대전을 막 지나쳤고, 열차 밖 세상에서는 비가 내리나보다. 염소똥 같은 투명한 빗방울들이 미끄러운 창문에 매달리지 못하고 흘러내려간다. 달리는 열차의 속도에 미련이라도 갖는 듯한 느낌으로 내 귀 옆으로, 옆으로 지나간다.
열차 안 과한 냉방 탓에 몸을 움추렸다. 비가 와서 그런지 퍽 선선한데 에어콘을 꺼줬으면 좋겠다. 결국 허벅지가 시려 긴 바지로 갈아입었다. 몸을 덮을게 필요했는데 그럴만큼의 따스한 것이 없었다. 내 가방엔 얇은 것들만 가득가득했다.
서대전역 차창 너머 우산들 아래의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군가의 얼굴을 찾으려한걸지도 모르게, 난 그 얼굴들이 궁금했다. 비 오는 날의 늘상있는 울적한 기분인데 왠지 오늘은 적당한 핑계가 있을 법하다. 우울한 기분이 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대전에 다다르기 전에, 통신사 무료영화 쿠폰이 문자로 왔다. 마침 나는 기차 안에서 무료한 참이었고 그 영화는 ‘너의 이름은’ 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틀고 나오는 ost 사이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 순간 누리호 1475호차가 하필 서대전 역에 도착했다. 나는 그 이름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이름은 아직도 우울한 목소리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껐다. 그리곤 내가 아는 주소가, 이젠 정확한지도 모르겠는 몇 글자가, 스쳐갔다. 나는 어떤 멜로 영화의 주인공처럼 빗 속을 달려가 누군가의 집앞에 서있는 상상을 해보았다. 끔찍했다. 나는 그렇게 감상적인 놈이 되지 못하고, 현실은 시궁창. 이미 너무 멀리 와있었다, 그런 짓을 하기엔. 이젠 그 여자 얘기를 해도 지루하고 푸석푸석해서 잘 하지 않는데 대전역이라는 공간이 조금 그 여자 얘기를 꺼내게했다. 대전역을 지나치고, 공간은 기억되는대로 왜곡되기 마련이라, 대전역은 왠지 칙칙한 회색의 느낌으로 남았다. 그게 바로 그 여자 때문이겠지. 나는 대전이 싫다. 딱 1년 1개월 전부터 대전이라는 말에는 왠지 상처가 남는다. 배설되지 않는, 뭉뚱그려진 상처가 남는다. 아니, 그런 상처를 움찔거리게 한다. 대전이라는 말은 소금 같은 단어가 되어버렸다.
갈 길이 멀다. 대전에서 장성까지는 앞으로 두시간 정도 더 가야할텐데 대전, 둔산동, 은행동, 성심당 따위의 단어가 눈에 남는다. 눈을 감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상처에 소금이 뿌려진 기분.차창에 흐르는 빗방울들처럼 나도 무엇에 미련이 남아있나보다. 이 미련에선 염소똥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