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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Feb 23. 2016

아직 너를 미워해

그에게 처음으로 연락이 온 날 밤. 나는 우습게도 기뻤다. 초라했던 내 이별이 나름의 보상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렇게 바닥은 아니었구나. 그것을 결국 그로부터 증명 받고, 크게 안도했다.


비슷한 패턴으로 종종 연락이 왔다. 늦은 밤이었고, 그는 취해 있었으며, 잘 지내냐고 물었다.


그 텀은 다양했는데 한달, 일주일, 하루 걸러 다음날에 연락이 온 적도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10통 넘게 걸기도 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듯 그는 처절하게 연락했다.


나는 그의 질문에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통화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정적이었다.


원래 말주변이 없는 그는 군인 시절 전화를 걸고도 이런 정적을 자주 끌고 오곤 했었다. 그럴 때면 속으로는 차라리 끊지, 하고 바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군인은 고집처럼 전화를 끊지 않았다. 콜렉트콜로 걸었던 적이 많아서 그 요금만 월 10만원에 달하기도 했다. (내 돈...) 물론 요즘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딱 그 때처럼 그는 전화를 끊지 않고 버텼다. 내가 끊으려 할 때마다 끊지말라며 간절하게 애원하기도 했다.


지금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나는 그의 말을 차갑게 무시해버릴 순 없었다.


사랑싸움처럼 이별을 반복하던 때에는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가 보고싶었다. 끼니때면 그의 밥 걱정이 밀려와, 단지 밥을 먹었는지를 묻기 위해 다시 연락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랬던 때와 오늘의 이별이 다른 점 중 가장 큰 것은, 이제 더이상 그가 보고싶지도 궁금하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는 내게 자꾸만 묻고 있다. 잘 지내느냐고, 밥은 먹었냐고. 그 질문의 뜻이 단지 거기에로 멈춰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탓에 나는 마음이 턱턱 막혀왔다.


둘이 함께 끝낸 첫 이별이었다. 그는 이제와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들숨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를 버려두었던 시간을, 내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이유없는 사랑을, 우리를 지키기 위해 혼자 견뎠던 나를. 이제 깨달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나를 거칠게 대하던 그 때의 자신을 후회한다고도 했다. 그 사과는 진실되었고 나는 그의 진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진작 했어야지. 이성을 찾은 내가 간신히 전화를 끊었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오랜만에 밤 산책을 했다. 그를 잃지 않기 위해 내 슬픔을 삭히던 그 곳으로. 그를 잃고 난 후 되레 담담해진 마음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고 무작정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 깨닫는다. 나 아직, 그를 미워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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