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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Jan 16. 2018

연애 그리고 자격지심, 짙은 모순에 대해

내게 가장 싫은 일은 당신이 나를 동정하거나 나를 떠나버리는 것, 내가 가진 상처를 감당할 수 없어서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 불쌍한 아이야. 사람들 앞에서 나를 감싸 안는 것. 나는 그것이 싫어서 당신 앞에 더욱 고고하게 고개를 든다. 당신이 나를 동정하지 않도록, 내 삶이 당신에게 안타까워 사무치지 않도록. 당신이 모르는 나의 시절, 무릎이 저는 추운 겨울과 먹어서는 해소되지 않았던 지독한 허기와 목까지 이불을 잡아 당겨서 숫자를 세어야 잠들 수 있었던 밤을 태연히 감춘다.

또 싫은 것은 떠나버리는 당신의 뒷모습. 나를 감당할 수 없어서, 나의 약점을 눈으로 바라볼 수 없어서. 당신의 무릎을 벤 내 머리를 끊임없이 끌어올려주다가 내 두상을 어루만지다가, 관자놀이를 머뭇거리다가, 그만 ‘헤어지자’라고 당신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올 순간이 두려워진다. 때로는 공허하고, 때로는 처연하게 슬퍼진다. 나를 두고 가면, 나를 차마 버티지 못한 마음이 죄책감으로 남아서 당신은 먼 길을 걷는 내내 울텐데. 가련한 나의 삶을 벗어나서 완연하게 행복해지지 못하고 내가 불쑥 불쑥 떠오르는 밤이면 술잔에 입술을 가져다 댈텐데. 어떻게든 내 손에 미안하다는 말이 칠갑된 편지를 쥐어주고 고요한 새벽을 가르며 당신은 술 냄새를 떨치려 노력하며 당신은 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울며 나를 벗어나 달려 갈텐데. 그러고도 몇 번을 또 내게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빌텐데. 내가 아무리 웃으며 살아도, 당신에게 나는 가슴 아린 존재로 영원히 기억 될텐데.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의 약점은, 나다. 나를 잡아먹는 자격지심이다. 나의 가족이고 내 삶이다. 너무나도 충만한 당신을 만나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욕심인가? 생각한다. 당신은 나보다 윤택한 사람을 만나야 할 것만 같다. 그 모두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나의 삶에 대해 통탄하고, 엄마를 동정하는 나의 탓이다. 나는 내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그늘이 너무 짙어서 두려워지곤 한다.

당신은 나의 어떤 부분을 가장 사랑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감추며 묻는다. 당신은 나의 눈동자를 쫓아 바라본다. 마주잡은 내 손등에 조용히 입술을 묻는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목소리가 단정하게 흘러나온다.

맑은 낯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볼과, 웃을 때면 얇게 그늘을 피어내는 동그란 눈과, 부드럽고 따뜻하고 축축한 입술과, 납작한 뒤통수와, 둥글고 좁은 어깨와, 양말을 신고 자는 버릇과, 화를 내지 못해서 눈물부터 흐르는 억압된 분노를 사랑해. 페이퍼 타올 한 장보다 기어이 핸드드라이어를 찾는 손가락이 더 긴 손바닥을, 건조한 머리칼과, 목덜미에서 나는 포근한 살냄새와, 마구 결이 솟아있는 짙은 눈썹을 사랑해. 한없이 나태하다가도 세 시간을 꼬박 청소하는 너의 기운을, 감기기운이 오르자마자 엉덩이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금요일 밤이면 최대한 늦게 자려하는 너의 아이같음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봉지과자를 뜯는, 시간이 가지 않을 때면 책을 읽는, 동물농장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 막연히 우는, 너의 삶을 사랑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당신은 이미 나를 아련하게 바라본다. 내 가장 깊은 어둠을 조금도 들여다보지 않은 채 당신의 시선이 상처를 관통해 지나친다. 당신의 눈에 비친 나는 이미 안쓰러워 보인다. 당신이 나를 매 시간 걱정하는 탓이다. 내가 밥을 먹지 않았을까봐, 늦잠을 자서 컨디션이 엉망 일까봐, 샤워하고 머리카락을 오래오래 말리느라 감기에 걸릴까봐, 당신은 온통 걱정 뿐이다. 나는 그것이 동정이 아님을 안다. 나를 향한 걱정임을, 사랑임을 알고 있다. 당신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눈으로 나의 그늘을 품는다. 볼에 올라온 작은 뾰루지 때문에 당신과의 데이트를 취소라도 한다는 듯, 나의 걱정은 순간 하찮아진다. 당신은 나의 약점이 나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고 온화한 표정으로 말한다.

당신이 나를 이해한다.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괜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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