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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Oct 10. 2018

미안한 연애

초라함을 견디는 연인

20대의 빈곤은 당연한 일이라고들 하지만 간혹, 현실의 무게가 너무 버거울 때가 있다. 치킨 한 마리 사먹는 일로 반나절을 고민하는 시기. 택시를 타는 대신 20분 넘는 거리를 걸어야 마음이 가벼운 시기. 치기어린 나의 꿈보다 다음 달 월세 낼 돈이 더 중요해지는 시기.
 
나는 그 시기의 한 가운데에서 당신을 만났다.
 
당신은 사랑을 이유로 나의 가난한 마음을 모두 끌어안았다. 꿈이 있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말해준 당신으로 나는 수많은 밤을 허기 없이 보냈다.
 
때로는 느슨해진 마음 틈으로 바람이 불고 이내 현실과 타협하고 싶어지면 당신은 나의 조용한 언덕을 불러내었다. 그 언덕 위에서 날갯짓하는 나비를 다독이며 볕 좋은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따뜻한 말만을 해주었다.
 
나는 그랬는데 나는 당신이 있어 깜깜한 터널을 지나 올 수 있었는데, 그러느라 당신에게 뜻밖의 짐을 지어준 일이 마음 시리다.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장 초라한 시절을 가감없이 내보이게 되어 때로는 죄스러웠고, 때로는 창피했고, 때로는 사무치게 미안해졌다.
 
엄마보다 더 가까운 현실에서 나의 끼니를 걱정하느라고, 나의 이마를 짚어보느라고, 염려하는 당신의 마음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인생을 짙게 드리운 최초의 그늘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빈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켜놓고 잠들던 유년, 혼자 있는 하루가 별다를 것 없었던 날들, 남들에게 약점을 보이는 일이 싫어서 가면을 쓰고 그 가면위로 색색의 분을 발랐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어쩌나 싶게 다정한 당신은 나를 누군가에게 처음 기대게 만들고, 품에서 엉엉 울게 만들고, 이내 가면을 벗고 볼이 뽀얗고 눈두덩이가 부푼 맨 얼굴을 보이고 싶게 했다.
 
당신의 큰 손바닥 뒤에 숨어서 밤이 되면 외로워지는 마음을 잊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인생을 그저 살고 싶어졌다.
 
계절마다 피는 꽃나무가 사는 나의 언덕을, 당신에게 공유하고 싶어졌다.
 
어느 날은 우리의 연애가 길어지는 동안 당신은 나에게서 걱정하는 법만을 배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당신을 보내 주어야겠다고 부끄럽지만 마음으로 수없이 슬퍼진 일이 있었다.
 
그런 내게 당신은 오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20년 훌쩍 넘는 시간을 존재도 모르고 살던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태연하게 안착한다. 단정한 힘으로 자리를 새긴다. 비바람이 찾아와도 쉽게 흘러가지 않을 만큼 공간을 남긴다.
 
그만큼 떼어내기도 힘들다. 떼어내고도 살이 차오를 때까지 오래도록 비어있을 것이다. 그 허공으로 고독이 고여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도 오늘 당신은 가장 여린 살로, 나를 안내한다. 가장 아무도 닿지 않은 품으로 나를 안는다. 그곳에서 나는 신발을 벗고 기어이 가면을 벗고 당신의 여린 살에 얼굴을 묻는다. 나의 맨얼굴이 초라하지 않을 때까지 얼마만큼이고 그러고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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