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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Mar 07. 2020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

사랑하는 것에 서툴렀던 시간이라고 하겠다. 바야흐로 나의 연애의 시대는 20대가 되자마자 찾아왔다. 떠들썩한 폭죽놀이를 즐기고, 제야의 종이 치고, 우습게도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한 살 씩 할당된 나이를 새로 먹게 되는 새해 첫 날. 그 날을 기점으로 나의 연애도, 사랑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는 몇 차례 연애 아닌 사랑을 했었다. 짝사랑인 적도 있었고,  나를 들뜨게 하던 사람과는 연애 비슷한 것을 하기도 했다.


그 때는 '썸'이라고 하는 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그래서 책임질 수 있었다. 얼마의 기간을 두고 상대방을 알아가고 설렘을 만끽하고 어느 날 '사귀자'는 한 마디로 세상의 전부를 줄 수 있게 되었다.


또 그래서 관계는 간결했다. 사귀거나 아니거나. 그 중간의 사이는 잘 모르고 살았다.


서로를 알아가던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한 발짝 씩 물러선 과거의 나와 상대방'들'은 친구로도 지내지 않았다.


사귀지 않았고, 그럼으로 헤어지지도 않은 사이. 그렇지만 친구로 남을수도 완벽한 타인으로 돌아설 수도 없는 사이로 남은 남자들.


문득 그 남자들이 떠오르는 밤이 있다. 나에게 다정했고, 내가 사랑했으나, 연인이 될 수는 없었던 '사이'들. 나를 사랑했으나, 내가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 오해로 멀어진 인연. 시작점에서 끝내 돌아서버린 사람.


모순적이게도 꽉 찬 퍼즐의 형태를 갖춘 것들은 없다.


어떤 얼굴이 생각나면 목소리는 영 가물가물하고, 달력을 바라보다가 오늘 생일이구나 싶어지는 사람의 이름은 아득하다.


컬러링이 인상적이었던 이의 전화번호는 도무지 떠오르질 않고, 젓가락질을 고쳐주던 남자는 몇 살이었는지 당췌 알 수가 없다.


모두 중구난방이다. 어제 일처럼 설레기도, 좋은 일만 남아 떠올리면 아련해지기도, 불쾌한 감정만 자리해 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나를 성장시킨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좋든 싫든 나에게 티끌만큼이라도 경험치를 남겼다는 것.


지인과 술자리를 하다가 우연히 동석하게 되었던 과거의 어떤 이는 풍성한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머리숱이 인상적이라고 말을 건넸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탈모약을 먹고 있다"는 TMI였다. 나는 그러냐며 대충 웃어넘겼다. 그는 곧이어 방금 사우나를 다녀왔다며 기초 화장품도 바르지 않은 얼굴이라고 멋쩍게 웃었다.


지인이 자리를 떴고, 싱글이었던 우리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나는 그 사람의 그 헐랭함이 좋았고, 그는 저보다 어린 내가 분위기를 주도해나가는 게 색달랐다고 했다.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주말인 내일 만나서 해장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그가 물어왔다. 좋다고 대답했다. 당시 그의 단어선택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날 만나서 그와 점심, 저녁을 먹었다.


점심으로 정말 해장국을 먹게 됐을 때는 어색하고 낯설어서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게, 나체만큼이나 쑥스럽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들렀고 3시간 넘게 대화를 했다. 공통분모를 찾다가, 서로의 이야기를 하다가, 연애관이며 이상형 심지어는 과거의 연애사까지 대화 소재가 됐다.


한 뼘 정도의 간격만을 두고 가까워진 우리는 저녁 메뉴로 곱창을 선정했다.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며 애틋한 눈을 교환했다.


당시의 나는 젓가락질이 서툴렀는데, 그는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자, 이렇게.


내 검지와 중지를 옮기며, 젓가락 위에서 애틋한 스킨십을 했더랬다.


내가 몇 번 시늉을 해 보였더니 금세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었다.


결과적으로 그와는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어긋났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도 습관이 되어 잘 고쳐지지 않는 젓가락질을 몇 달간의 노력으로 교정 했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정석의 젓가락질을 하게 됐다.


그로 인해 터득한 젓가락질로 하루에 3번 밥을 먹는다.


젓가락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내 손에서 유영하는 긴 다리의 두 스틱을 볼 때면 하릴없이 그가 떠오른다.


단 2일간의 만남은, 나의 오랜 습관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 습관은 그를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로 남았다.


사귀지 않았고,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그에게 연락할 수 없을까. 무엇보다 나는 왜 자꾸만 그를 떠올릴까.


나는 이보다 강렬한 그 무엇의 사랑을 겪어본 적이 없다.


응, 이건 사랑이다.


사랑이 몽글몽글한 것인줄로만, 소용돌이를 동반하는 것인줄로만, 차갑고 축축하고 슬프고 쓰린 것인줄로만 정의하고 살았는 지 모른다.


사랑은 이렇게도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주 긴 시간이 흘러서야 도달할 수 있기도 했다.


나를 울리지 않고,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음에도 사랑으로 남은 순간. 그것도 사랑인줄로 안다.


함께 찍은 사진이 없어 그리워 할 수 없고, 나눴던 대화는 서로에게 분절되어 있지만 이 모든 게 사랑인줄로 안다.


봄이 지고, 장마가 오면 여름을 알듯 나의 사랑도 철따라 피었다 사그라들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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