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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Apr 27. 2020

당신이 어서 괜찮아지길 바라는 전연인으로부터

덜 사랑했던 사람의 이별

딱 이만큼의 사랑이었다. 양은냄비처럼 화르륵 끓어올랐다가 차분하게 식어버린 연애.     


나는 담담한 사랑만큼이나 담담한 이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갓 헤어졌지만 오늘의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한 그릇만큼의 밥을 먹었고, 말을 걸어오는 이와는 유연한 대화도 했다.      


죽을만큼 힘들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이 사랑의 경중 때문인지, 내가 어느덧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 가늠할 수 없어졌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면 늘 나의 첫 이별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듯이 울기만 했던 시간, 물만 넘겨도 게워내고 바닥까지 엎드려 이별을 부정하던 그 시간.     


결국 그 사랑은 떠났지만 이별의 순간은 내게 오롯이 남았다.     


몇 번의 이별은 처음 이별만큼 아프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또 몇몇의 이별은 그보단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찾아온 이번 이별은 왠지 견딜만하다.      


사실 사랑을 하면서 나는 줄곧 이 사랑이 끝나기를 바랐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목울대가 뜨겁게 울렁하면서도, 만나고 돌아선 밤이면 우리가 안 맞는 부분들에 대해서 조용히 생각하곤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발가락이 오무라들면서도, 어느 타이밍 쯤 헤어져야 할까 계산하고야 말았다.  

   

끝이 있는 연애를 떠올린다. 한 명은 결혼 생각이 없다던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한 서로의 성격이라던가, 연애를 시작하고도 끝나지 않는 짝사랑이라던가... 게 중 어딘가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너와 어떤 연애를 했을까? 어떤 연애를 했길래 나는 기어이 끝을 짐작한 채로 너와 사랑을 했을까.     


우리는 자주 다퉜다. 반나절도 못 가서 늘 화해했지만 연인 간의 다툼은 늘 필요 이상의 감정 소모를 유발했다.


여느 날도 별일 아닌 다툼을 잇다가 ‘이렇게 헤어지는 건 어떨까?’ 싶어지며 동시에 서글퍼졌다. 나는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는구나 싶어졌기 때문이다.     


사랑하지만 헤어지고 싶은 날들. 모순의 밤이 이어졌다. 어쩌면 애증과도 같은 말이었다.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미워하지만 사랑하는 감정. 관계를 지속하고 싶으면서도 이만 끝내는 게 좋겠다고 여긴다. 그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랑은 끝나 있었다.     


이별을 지내는 동안 문득 문득 가슴이 갑갑하다. 마음은 내내 쓰리고, 밤이면 술 생각이 완연하다. 울컥하기도, 서글프기도, 헤어지자는 말에 돌아선 상처받은 등이 아른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참아보기로 했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진 않다. 어차피 찾아 든 아픔을 모두 견뎌내고 후련해지고 싶다. 그가 나를 붙잡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나는 겪어본 적 없는 방식의 이번 이별을 두고 다른 각도에서 첫 이별을 떠올렸다.     


내가 이별에 허우적대는 동안 꼿꼿하고 단정하게 자기 길을 가던, 나의 전 연인이 떠올랐다. 사랑은 나 혼자 했던 건지 나는 이렇게 죽겠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멀쩡하구나 싶어 더 비참하게 하던 사람.    

 

나를 한 번만 봐달라고, 못 이기는 척 다시 만나자고 빌어봐도 묵묵하던 그 사람.     


오래전 그 사람은 아마도 나보다 지금 내가 겪은 사실을 먼저 알게 되었던 사람. 그래서 그렇게 단단하게 이별을 걸어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사람은 지금 나와 같은 감정으로 이별을 건너오지 않았을까. 이해 아닌 이해를 한다.     


후에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너와 나는 연인이었지만, 좋은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종종 안부를 물으며 지내자.     


나는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시간이 충분히 흘렀기 때문에 감정을 모두 정리한 상태였는데도, 너무나도 태연한 그 말에 분이 났다. 왜 나보다도 먼저 괜찮아졌는지, 왜 아직 나는 그 시절을 살고 있는 것 같은지 서러워져서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고 그를 쏘아붙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습게도 지금,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당신을 더는 사랑할 수 없지만 때때로 궁금할 것 같아서.     


여전히 끼니를 대충 때우는지,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지, 가족에게는 전화를 잘 하지 않는지 주제넘게 간섭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칠칠맞지 못해 몸에 멍을 달고 다니는 나를 늘 염려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에 걸리던 나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으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걱정하는 것. 희망고문이나, 어장관리와 같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한, 연인이었던 사람에 대한 은은한 연민.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이제는 내가 간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너를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모두 내가 감내해야 한다는 것. 미련처럼 남을 너에 대한 걱정과, 염려와, 사랑의 한 조각이었을 감정을.     


나를 사랑하긴 했냐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사랑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사랑스러운 네가 나보다 더 배려심이 깊은 사람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기를 바라니까.     


우리의 애틋했던 사랑이 더 나빠지기 전에, 좋은 추억만을 간직하고 싶다는 것. 핑계처럼 들리지만 사실이었다.


내 이별의 말을 듣고 더 상처받은 표정을 짓던 너에게 덧붙여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간사한 이기심으로 너를 걱정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그가 그랬듯 나는 이별에 냉정해진다. 사랑이 이렇게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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