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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Mar 28. 2020

나의 불행하고 사랑스러운 연인

그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이따금 주린 배를 라면만으로 채워야 했을 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여전히 미워서 무덤 한 번을 가보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 부모를 대신해 저를 키워주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대학을 포기하고, 청춘을 포기하고, 기어이 삶의 무게를 져버린 때.     


그의 삶은 불행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그는 나에게만 모든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담담하게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 담백함은 그 또래 나이대의 그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오래 홀로 견딘 중년. 나는 그를 그렇게 느끼곤 했다.     


그는 내 앞에서 저도 모를 얼굴을 보여줬다. 힘들고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어리광 비슷한 것을 부리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럴 때면 군살없이 마른 그의 등을 슬쩍 다독였다.     


위로였다. 그는 나의 위로를 좋아했다. 동정없는 이해. 그 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보다는 덜했지만 나도 불행한 삶을 건너오고 있었음으로, 나의 이해는 그에게 오롯한 위로가 되었다.     


어른이 된 그는 여전히 담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틈을 보일 줄 안다. 오로지 나에게만 드러내 보였다.     


부끄러운 건 아닌데 나의 불행이 나의 약점이 되는 건 싫어     


나는 그 틈 사이로 간사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나만이 알고 있는 그의 짙은 그림자, 어린 얼굴, 투정.     


불행을 가릴 줄 아는 어른이 된 그는 더 매력적이다.      


그 사람을 관통한 여러 연인. 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그의 세계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 어쩌면 그 사실이 나에게 더 크게 작용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사실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오래전 이미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직도 어린 나는 그의 불행에 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짊어진 불행만으로 내 인생은 충분히 불행했음으로.     


나의 불행은 10대에 모두 온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나에게 그 역시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다. 나와는 다른 이유였음을 알고 있다.     


나는 소중한 사람들만 초대해서 아주 작은 결혼식을 하고 싶어.     


나에게 문득 그렇게 말하던 그의 억양을 눈치챘다.     


청첩장에는 부모 이름 없이 신부, 신랑 이름만 새겨 넣을거야.     


동의라도 구하듯 지긋하던 눈빛. 나는 그 눈빛 사이로 감히 몸을 던질 수 없다.     


가난과 불행은 왜 동시에 오는가. 그를 두고 한참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는 하루 4개의 아르바이트로 꽉꽉 들어찬 나날을 견뎠다.     


내가 흔한 연애를 하는 동안 그는 언제나 미안한 연애를 하고, 이내 그마저도 견디지 못했다.     


나의 시험기간이면 동틀 무렵 독서실로 찾아와 얼굴을 한 번 보여주던 그는, 화물차를 운전해 멀리 지방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울적해졌다.     


그의 삶이 불행한 것이 나에겐 죄책감으로 작용했다.     


너의 불행을 혼자 알고 이해하지만, 사랑할 수는 없어서 미안한 나날.     


그가 불행에서, 가난에서 벗어나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전제를 한 감정은 진짜 사랑일까.     


나는 그 딜레마에서 퍽 괴로워졌다.     


연애는 재미가 없었고, 이유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고 끊기 싫어진 밤들이 길었다. 그리고는 기어이 너의 불행을 함께 해볼까 싶어지고야 말았다.     


불나방처럼, 그 뜨거워 어쩔 줄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로 달려들고 싶어진 것이다.     


그는 내가 저의 불행을 모두 알아서 사랑한다고 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할 말들을 내게는 할 수 있어서 사랑한다고 했다.     


혹자는 혼자일 때 이미 행복한 사람 둘이 만나야 건강한 연애가 가능하다고 한다.


모두가 완벽한 연애를 할 때, 나 하나만큼은 어리석은 사랑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내가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은 사람에게 여전히 약하다. 내가 없으면 저의 인생이 마냥 초라하다고 매달리는 이.     


어쩌면 그 사람만큼이나 불행하고, 손해보는 일이 싫어 영악한 나의 이기심을 알고도 나를 특별히 사랑해주는 사람.


아, 안정된 것과 불안정한 것.


전자를 떠나 후자에로 달려드는 삶을 오늘은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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