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초보엄마의 뼈아픈 경험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이야기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 둔 해 1월부터 풀타임 이모님에서 파트타임으로 넘어갔고, 첫째는 방과후 한 두가지 학원을 들렀다가 오후 3시에 집에 돌아왔다. 매 분기마다 방과후 스케줄 표를 만들어 이모님과 공유했다.
당시 둘째는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기에 3-4시 사이 이모님과 하원 후 저녁을 차려 먹는 것까지 챙겨주셨다.
초등 저학년 하교는 보통 12시30분에서 1시 정도이므로 이모님을 그 시간부터 쓰자면 비용이 너무 올라간다. 그렇게 첫째의 학원 뺑뺑이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됐다.
어릴 적부터 순했던 첫째는 엄마 없이도 방과후와 태권도, 학원 등을 비교적 잘 소화해냈다.(지금은 많이 달라져 유감이지만…)
하루는 회사에서 회의중이었는데 첫째 영어학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회의실 밖으로 나와 통화를 했다.
“어머님 ㅇㅇ이가 학원 오는 셔틀을 타기 전에 1학년 아이 A와 다툼이 있었던 것 같아요. A 부모님이 어머님 연락처를 달라고 하시는데 드려도 될까요?”
그동안 밖에서 트러블을 일으킨 적이 없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얘기를 들어야 겠다는 생각에 연락처를 전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전화를 걸어온 건 A라는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 나는 그 아이의 아빠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A가 영어 학원 셔틀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좀 남아서 학교 교내에서 기다리는데 ㅇㅇ이랑 같이 있었나보다. 근데 ㅇㅇ이가 A의 키즈폰을 뺏어 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몇시냐고 물었는데 일부러 잘못 알려줘서 셔틀을 놓친줄 알게 해 A를 골탕먹였다. 이건 엄연한 학교폭력이지 않나!!!
학원 셔틀을 기다리는 사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 같았지만, 한쪽말만 들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에 나는 퇴근 후 아이에게 말을 들어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A의 아빠는 더 화가 난 듯 다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S전자 다니는 변호사라는 둥 학교폭력위원회 자문위원인가 뭔가 하는 감투를 쓰고 있는데 마치 자기가 한번 나서면 잘못한 놈들은 무조건 벌받게 할 수 있다는 뉘앙스로 나를 위협했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잘 몰라서요. 학교폭력위원회가 뭐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그는 학폭위를 모르는 내가 우스웠는지 장황하게 설명을 이어갔고, 단계별로 처벌수위가 어떤데 자기가 학교에 이미 신고를 했으니 나중에 참석해야 할 거라고도 말했다.
나는 첫째를 처음 초등학교에 보내본 초보엄마인지라
‘학폭위’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내가 살아온 상식 범위에서는 아이들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우선 아이들에게 팩트체크를 한 뒤 부모가 만나 시비를 가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밝혀지면 그에 응당한 사과와 보상을 하는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도 문제가 지속되거나 해결이 안되면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학폭위를 여는 거 아닐까. 마치 회사에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인사위원회를 열고 징계와 처벌을 하는 것처럼.
하지만 A의 아빠는 나와의 첫 통화에서 너무도 단호하게 우리 아이를 ‘문제 아이’로 확정지으며 나를 몰아세웠다.
낮에 일어난 상황 때문에 자기 아이가 놀라고 두려움에 떨었다는 건 알겠는데, 금쪽같은 자기 자식이 해꼬지를 당해
화가 난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초면에 전화통화를 하는 내게 너무 심하게 퍼부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처음인 나는 속절없이 당해버렸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상대를 진정시키고 퇴근 후에 아이에게 확인한 다음 직접 찾아가서 사과를 드리겠다고 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눈물은 줄줄 새어나오고 학폭위인지 뭔지에 불려가서 처벌을 받으면 아이의 학교생활부에 빨간줄이 가는 건가 무지한 걱정을 했다. 낮에 일어난 상황이 각 아이들 담임선생님과도 공유가 됐다고 해서 우선 아이의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얼마전 상담을 하고 왔을 땐 아무 문제 없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안좋은 일로 전화를 하게됐다.
선생님과 통화하면서도 진정이 되지 않아 눈물을 흘렸다.
1학년 A의 담임에게 이야기를 들었고, ㅇㅇ이가 비슷한 문제가 있던 적이 있냐고 물어서 없었다고 말했다. ㅇㅇ이가 키즈폰을 잠깐 가져간 사이에 A가 오해를 하고 자기 담임에게 키즈폰을 뺏겼다고 말하러 간 것 같다. 그 집 아빠가 학폭위 이야기를 꺼냈는데 너무 걱정마시라. 설사 학폭위가 열린다고 해도 졸업하면 기록에 남지 않는다.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하고 칼퇴근을 했다.집에가서 아이에게 차분하게 물어봤다.아이는 낮에 일이 이렇게 커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육아 경험이 많은 언니들에게도 단톡방으로 SOS를 쳤다. 언니들은 좋게 해결해 보라면서 가급적 아이와 함께 가서 사과를 하라고 했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우리 아이는 A의 키즈폰을 업데이트 해준다고 잠깐 가져갔고, 다시 돌려주려 했을 때 A는 자기 담임에게 가버려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시냐고 시간을 물었을 때는 우리 아이도 지나가는 다른 아이에게 시간을 잘못 듣고(혹은 그 아이가 잘못 알려줘서) A에게 잘못 알려준 것이다. 우리 아이는 1학년 때 키즈폰을 사용했는데 금세 싫증을 내서 쓰지 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둘다 영어학원 셔틀을 제 시간에 탑승해서 학원에 잘 도착한 건데 어떤 루트인가로 A의 부모에게 전달이 되고 문제가 터진 것 같다.
어쨌든 A의 아빠가 너무도 화를 내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옆 단지에 산다는 A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학폭위만은 막아야 겠다는 생각에 남편과 아이까지 대동해 찾아갔다.
A와 그의 아빠가 내려와 1층에서 만났다. 나는 연신 사과의 말을 전하고 학폭위 신고는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학교측과 상의해보고 연락을 주겠다며 여지를 남겼다.
A는 한 살 어린 동생이지만 체격이 큰편이었고, 우리 아이는 마르고 왜소했다.우리 아이가 상상했던 ‘문제아’처럼 보이지 않았는지 직접 찾아가서 사과한 효과인지 A의 아빠는 화가 조금 누그러진 듯 했다. 우리는 아이에게 직접 A에게 사과하도록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착잡했지만, 어쨌든 다른 아이의 물건을 가져가 불쾌하게 만든 잘못이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하자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아이에게 타일렀다.
거대한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감정은 지쳐있었고 왠지모르게 비굴했고, 무엇보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며칠 뒤 A의 아빠와 통화에서 그는 학폭위는 신고안하기로 했는데 한 가지 요구사항이 있다고 말했다.
A가 ㅇㅇ이와 영어학원을 같이 다니기 싫다고 하니 반을 다른 시간대로 옮겨달라고 했다. 학폭위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바로 알겠다고 감사하다고 전화를 끊었다. 워킹맘들은 공감하겠지만 학원 시간대를 하나 바꾸면 모든 스케줄이 어그러진다. 즉 매우 짜증나는 상황인데도 나는 오케이를 한거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날의 일을 곱씹을수록 너무 지나친 언어폭력을 당한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몰고가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내가 아이를 잘못가르친건지 워킹맘이라 아이에게 무언가 결핍이 된건지 자책도 했다. 출근길에 버스에 서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
아이에게 필요 이상의 비굴함을 강요한 것 같아서다.
학원 시간대를 옮겨달라고 말한 걸 보면 처음부터 A가 우리 아이를 싫어했던 건 아닐까. 영어학원 선생님과도 얘기해봤지만, 수업중에 자리도 떨어져 앉고 별로 말도 하지 않는다 했다.
당시 일로 학폭위에 대한 트라우마가 조금 생겼는데, 얼마가 지나고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반 B가 C를 학폭위에 신고했데”나는
화들짝 놀랐다.
“어? 아.. 왜 그랬데?”
“C가 운동장에서 B를 괴롭혔는데 하지말라고 해도 계속 그래서 B네 엄마가 신고했데”
“아…음,,,(학폭위 라는 게 그런거구나ㅠ)”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보니 늘 밖에 나가서 피해를 주거나 입고오진 않을지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제 나는 학폭위에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쫄지는 않기로 했다.
학교 문화가 우리가 어릴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엄마들의 입김이 세서 학교 선생님들은 문제상황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교내에서 아이들간의 다툼이 벌어지고 엄마들 사이에 경고와 사과가 오가고 나서도 계속되면 학폭위를 열어 시비를 가리는 게 요즘 학교들의 일반적인 방법이 된것 같다.
선생님과 학생, 학부모 각자의 입장과 상황에 따른 합리적인 정책이겠지만, 8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나의 정서로는 다소 삭막함이 느껴진다.
더구나 코로나 상황이 2년째 지속되면서 선생님과 학생, 친구들간의 대면 빈도도 줄어들다보니 학교라는 존재감이 더 낮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교육을 시작하는 연령이 낮아져서 초등학교 때부터 국영수를 중심으로 선행교육이 당연시되는 현실에서 학원에서는 배울 수 없는 학교만의 존재의 이유를 만드는 게 시급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