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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안키친 Jan 27. 2022

아이에겐 부모가 온 우주라는 걸

이제 갓 열두살이 된 첫째 아들이 ‘사춘기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는 작년 초 무렵이다. 나이로는 열한살이 되었을 때였지만 생일이 11월이라 만으로는 10살이 시작된 무렵이었다.


육아휴직 후 회사에 복직하게 된 나는 가까이 이사오신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더 이상 이모님을 쓰기에는 경제적으로도 답이 없고, 부모님도 손주들 돌봐주시면서 무료하지 않으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청사진이었다.

부모님께 부탁드린건 초1 둘째의 하교와 두 아이의 방과후 스케줄 케어, 그리고 아이들 저녁밥이었다.


육아를 해보신적이 없는 아버지, 조카들을 봐주신 적은 있지만 아주 오래전 일인 엄마에게 말썽꾸러기 두아들을 부탁하게 되니 죄송하기도 불안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만 열살이 된 첫째가 앞장서서 훼방꾼 노릇을 했다. 이해할 수 없는건 집에서 보다 더 문제 행동을 일으킨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인 말과 행동, 식사 등 전반적인 예절은 온데간데 없고 둘이 싸우기 바쁘다”

퇴근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친정에 가면 거의 매일 듣던 이야기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사춘기를 앞둔 첫째의 반항심리에서 나온 문제들인 것 같다. 매일 방과후 할머니네서 지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아이들에게 버거운 임무였던것 같다. 첫째가 잘 해내지 못하니 동생도 적응을 못했다.


1년동안 옆에 있어준 엄마와 다시 떨어지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훈육 환경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었나보다 싶다. 아이들이 말을 안들을 때가 많으니 친정부모님은 당연히 이거해라 저거 하지 마라 하신건데

그게 낯설고 싫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당시는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하고 늘 탓하기만 했고, 아이들도 나도 나날이 지쳐갔다.




그런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날 급기야 첫째가 친구들과 카톡에서 가출 발언을 했다.


게임 과몰입이 걱정돼 한창 게임시간 단속을 하던 어느날 화가 난 나머지 돌발 발언을 한 것이다. 할머니에게도 느닷없이 가출할테니 안녕히 계시라는 둥 메세지를 보낸 걸 보니 기가 막혔다.


첫째가 10살 때 첫 육아휴직을 시작해 종일 붙어있다보니 사춘기 성향과 동시에 어리광이 늘기 시작했다.

반항할 때면 사춘기 청소년 같다가도 어리광을 부릴때면 애기같은 모습이 보여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건 아직도 마찬가지다.


10년차 워킹맘에서 전업맘으로 육아와 살림 홀로서기를 한지 약 2년이 되어간다. 처음 육아휴직을 내고 코로나와 함께 집콕생활을 하면서 무보수로 매일 과로까지 해야하는 생활이 허망했다. 밤에 잠이 안올 정도로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기에. 여기에 사춘기인듯 아닌듯한 첫째를 훈육하는 과정 또한 늘 계산대로 되지 않아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어렵사리 다시 회사에 복직하면서 워킹맘 생활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이번엔 아이들 케어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부모님께 마냥 죄송하고, 아이들에게 원망을 품고 살아야 하는 시간들은 이모님을 쓸 때보다 더 괴로운 날들이었다.


그리고 나의 건강에도 빨간불이 들어와 다시 육아휴직을 내게 됐다. 하필 목 수술 후 합병증으로 건강이 나빠지는 바람에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일상은 흘러갔고 엄마의 역할을 해내야 했다.


아이와 함께 싸우고 악쓰기를 반복하는 일상이 계속돼  불안한 나머지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도 받아봤다. 처음 상담에서 아이 문제를 말했는데 신기하게도 내 안에 응어리 진 한이 풀리는 것 같았다. 결국 엄마인 나의 문제로구나.


100%를 노력했는데 1%밖에 변화한 흔적이 보이지 않을 땐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훌륭한 선생님들의 책을 보면 나머지 99%는 보이지 않지만 아이 안에 저장돼 있을거라고 하지만 난 훌륭하지 못해서인지 곧잘 낙담했다.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고 자신도 없지만 한가지 진리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이에겐 부모가 온 우주라는 걸’


그동안 아이를 양육하면서 말을 잘듣고 문제가 없을 때는 엄마인 나도 평온했지만, 한가지씩 문제점이 생기고 늘어나면서 내 감정도 폭발한 적이 많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분노로 변해 막말을 한적도 있었다. 나보다 30살 넘게 어린 아들의 감정 기복에 내 감정은 더 크게 널뛰듯 했던 것 같다. 사십춘기란 이런 것일까.


말을 잘 들으면 천사같은 엄마에서 말을 안듣고 말썽을 피우면 괴물같은 엄마로 변하는 환경에서 아이가 배울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천사같은 엄마가 괴물같은 엄마보단 좋을테니 말을 잘 들어줄 거라는 얕은 생각은 통하지 않았다.적어도 우리아이들에게는.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주는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처럼, 부모는 아이에게 마음껏 뛰어놀고 경험할 수 있는 넓고 한결같은 우주가 되어 주어야 할 것 같다.그 안에서 잘하든 잘못하든 우주는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줄 수 있도록.  


본격적인 청소년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부모라는 우주 안에서 변하지 않는 큰 틀과 기준만 정해주고 스스로 해 나갈 수 있도록 믿고 지켜봐 주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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