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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바 Aug 13. 2021

지긋하지 못하지만 내 속도대로

   남편은 두 달 간격으로 명함을 주문한다. 느림보상점은 남편 번호를 대표번호로 쓰기 때문에 남편의 명함은 금방 동이 난다. 새로 주문할 때 나도 슬쩍 같이 주문하는데, 지난번에 만든 내 명함을 벌써 다 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주문하는 이유는 명함에 쓰고 싶은 내 소개글이 달라져서이다.


 

    처음에는 ‘과장’. 과자 만드는 장이라는 의미이다. 동물성 식품을 사용하지 않는 비건 베이킹에 매료되어 서울까지 배우러 갔다. 그때 나는 베이킹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쉬워서 금방 배우실 거예요”라고 말했다. 나는 열심히 배워 가게에서 브라우니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전날 구워서 숙성시킨 다음 아침에 포장해 판매했다. 판매는 생각보다 잘 되었지만 문제는 내가 이 일이 지겹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손목에 무리가 왔다. 재료로 들어가는 두부를 주걱으로 짓이기는데 힘이 많이 들어갔다. 결국 브라우니는 시작 2주 만에 판매대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은 참 지긋하게 빵을 만든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이 과정의 중간쯤, 아직 내가 과자 만드는 일에 열정이 식지 않았을 때 내 명함의 소개글은 ‘과자 만드는 마을 운동가’였다. 느림보상점 시즌1, 즉 산내에 있을 때인데 친구들과 함께 시골에서 재밌는 마을일을 해보자며 모였다. 친구들에게 명함을 나눠 주었다. 사실 저때 나는 과자를 만들지도 마을 운동가이지도 않았다. 그저 나의 바람만 가득 담았을 뿐. 명함을 나눠주며 앞으로 그렇게 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때는 아이들이 아직 어려 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렇게라도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내 명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기도, 기발해하기도 하며 나를 응원해 주었다.


 

    명함에 적을까 말까 고민했던 것 중 하나는 ‘기획, 매니지먼트’이다. 내가 늘 해 오던 일이다. 남편이 빵을 만들고 나는 다른 일들을 한다. 사람들이 종종 나를 사장 와이프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이 싫었던 것 같다. 나도 사장이라고, 빵은 남편이 만들지만 가게에서 보여지는 많은 부분이 내 작품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아주 잘 알게끔 ‘기획, 매니지먼트’라고 적을까 했는데, 단어가 너무 뻔하고 회사 용어 같아서 적지는 않았다.


 

    지금 내 명함에는 (2021년 8월 기준) 또 다른 소개글이 올라와 있다.

    Eat Pray Love

    잘 먹고 사랑하기. 그리고 기도가 더해졌다. 나는 종교는 없다. 하지만 기도는 좋아한다. 기도와 성찰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느림보상점은 단순히 하나의 사업이 아니라 나의 삶과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명함을 보면 나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시즌2를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둘째까지 모두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이들을 보내고 가게에 나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손님맞이를 하고 점심준비를 하고 판매할 브라우니를 만들었다. 초기에는 모든 게 불안정했다. 전에 하던 대로 여유롭게 생각하며 계산대에만도 서 있어 봤는데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매출을 늘여보자며 안 하던 비즈니스 공부를 해 와서는 목표도 세우고 이벤트와 고객관리도 했다. 그렇게 한 주를 일에 쏟아붓고 나면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주말이 버겁게 느껴졌다. 나도 좀 쉬고 싶은데, 안 놀아준다며 심심하다는 칭얼거림을 들을 생각에 두렵기까지 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금요일 저녁에 숙소를 예약해 아이들과 훌쩍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어디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때까지 잠만 자는 곳이던 집을 가꿔서 호텔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러면 그게 호캉스가 되지 않겠냐며 호기롭게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우리는 주중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파트를 나눠 내가 인테리어를 하고, 남편은 아이들과 놀아 주었다. 나는 곧 체력이 바닥이 났다. 남편에게 우스갯소리로 “만성피로가 내 이야기가 될 줄이야”라고 말했다.


 

    새로운 매장으로 와서 우리는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하면 되는 건지 속도를 줄일 수 있을지 몰랐다. 명함에 쓸 말을 고민하며 신나 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일을 다 남편에게 맡기고 주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그만 뛰고 이번 달은 한약을 지어먹고 조금 쉬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금방 다시 일하고 싶다고 그럴 거면서” 그래 맞다. 조금 쉬어 회복이 되면 분명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다시 일거리를 만들러 쏘아 다니겠지. 당신은 어쩜 그렇게 나를 잘 아냐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격월로 하는 일을 바꿔가며 살기로 했다. 한 달은 가게 일에 좀 더 매진하고, 한 달은 하고 싶었던 공부와 집안일에 더 신경 쓰기로 했다. 한 달 안에 가게와 공부 그리고 집안일까지 모두 균형 있게 나눠하는 방법도 있지만 해보니 잘 되지 않았다. 슈퍼에 가서 먹고 싶은 과자를 두 팔 가득 안고 나오면서 이리 떨어뜨리고 저리 흘리고 하느니 오늘 가서 세 봉지만 사고 내일 가서 다른 두 봉지 사 오자는 것이다.

    거기다 나는 확 불타오르며 에너지를 많이 내는 사람이라 불탈 때 일 하고 꺼졌을 때는 쉬면 된다. 쉬는 동안은 그간 일하느라 못 만났던 사람들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그러다 보면 다시 다음 달을 위한 연료가 자연스레 내 안에 차오른다. 안식월의 개념일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나는 완전히 쉬는 건 아니지만 안식월이라 부르고 싶다.


 

    물론 남편은 계속 빵을 굽는다. 내가 장작불이라면 남편은 가스레인지 같은 사람이다. 같은 세기로 지속적인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 우리는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에너지도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속도에 맞춰서 일한다.

    우리의 명함을 보면 그 모습이 보인다. 남편의 이름 밑에는 ‘느린빵 제빵사’, 내 이름 밑에는 ‘Eat Pray Love’라고 적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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