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 그 이상의 라떼
카페에 가면 라떼를 마신다. 딱히 커피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단 건 안 좋아해서 카페에 가면 적당히 쌉쌀한 라떼를 마신다. 반면 남편은 바리스타 출신답게 커피 취향이 확고하다. 커피가 맛있는 집에 가면 따뜻한 라떼를 마시고, 맛없는 집에 가면 오레오 셰이크 같은 걸 먹는다.
라떼는 카페에도 팔고 편의점에도 파는 흔한 커피이다. 거기다 급하면 인스턴트 블랙커피에 우유를 조금 넣어도 나에겐 라떼다.
가게에서도 커피를 팔고 있는데, 메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 번에 한 잔 씩, 기다림이 필요해요’
주로 바쁜 일이 없이 한가하게 빵과 함께 커피 한 잔 하려는 분들이 오신다.
커피 기계라곤 귀여운 휴대용 버너 위에서 느긋하게 끓어오르는 모카포트 한 대 밖에 없기 때문에 인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손님께 한 잔을 먼저 내드리면, “어, 저희 두 잔 시켰는데” “끓이고 있습니다, 곧 드릴게요” 이런 대화가 오가기도 한다.
팔고 있는 메뉴는 아메리카노 하나인데, 라떼를 좋아하면서 왜 메뉴에 올리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남편은 손이 많이 간다고 말했다.
우유를 냄비에 부어 적당히 데우고 통에 담아 손으로 열심히 펌프질을 해주면 고운 우유 거품이 만들어진다. 보통 카페에서는 스팀기로 몇 초만에 만들어 내는데 그에 비하면 참 느리고 지난한 작업이다.
한 번은 남편이 내게 모카포트 사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사실 별로 어려울 건 없어서 금방 배울 것 같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이유인즉, 지금은 "저는 할 줄 몰라서..." 하며 남편이 커피를 내올 동안 나는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것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내가 커피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실까지 더하면 거절할 명분은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주문을 받으면 묵묵히 커피를 뽑는다. 내가 입을 떼지 않으면 가게 안은 고요해진다. 그럼 나는 손님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요즘엔 집에서 모모를 보느라 가게에 잘 나가지 못하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넉살 좋게 이야기도 좀 하고 그러지 당신은 너무 말이 없어!
결혼 초에 남편은 자신이 말하기를 잘 못한다고 고백했다. 내 주위에도 말 많은 남자보다 과묵한 남자들이 더 많긴 했지만, 꼭 해야 할 말도 안 하면 곤란하다.
남편은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아니면 아니다, 이런 거 잘 못한다고 했다.
어쩌나 나는 반대라서 말을 많이 했다.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한 뒤에는 남편에게서 듣고 싶어 했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 흔한 메아리 조차 울리지 않는 고요한 남편이라는 산은 나를 많이도 서운하게 했다.
가끔 가냘픈 바람소리가 들려와서 귀를 쫑긋 세우면, ‘미안’ 하다고 했다.
이 주제에 대해 몇 번을 더 이야기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미안하다는 소리를 몇 번 더 듣고 나서 나는 문득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투정을 부리는 건가?
머리가 돌아가야 하니 급한 대로 인스턴트 블랙커피에 우유 조금 타서 라떼를 만들었다. 마시면서 계속 생각해본다.
꼭 해야 할 말이라는 게 있는 걸까? 단지 내가 말하는 걸 좋아해서 남편도 좋아하길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종이컵 한 잔 정도의 커피를 비우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남편, 당신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걸 알아요! 그럼 됐지요!
남편은 가끔 내게 물어본다. “라떼 마실래?”
그럼 나는 일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네!”라고 대답한다.
한참 뒤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커피 한가운데 귀엽게 떠있는 라떼가 나온다. 그리고 남편은 그제야 본인의 라떼를 만들기 시작한다. 자기가 마시고 싶어 나한테는 예의상 물어봤을 텐데 내가 먹겠다고 해서 내심 귀찮았을 거다.
그래도 만들어준다. 자기 것 보다 먼저.
이거다. 남편이 잘하는 것.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 수밖에 없는 이유.
모카포트로 만드는 라떼는 나에게 라떼 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