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더 모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사회는 공동체의 부재를 돈으로 메꾸고 있지요. 돈만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되었지만, 편하게 사는 것이 곧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적당히 벌고 잘 살고 싶은데, 또 그건 혼자 하면 재미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서 마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시골집을 한 채 구해서 친구들과 나눠 쓰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아무리 오래된 집이라도 땅값과 집을 고치는 비용을 합하면 억이 넘어가는 꽤 큰돈이 필요합니다. 한 동네에 여기저기서 흩어져 사는 방법도 있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하다 보면 결국 당장 실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돈을 모아서 10년 뒤에 마을을 만들자 계획하기에는 지금의 삶이 중요했습니다. 웬만해서 밀고 나가는 성격의 저이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답이 나오지 않자 살짝 풀이 죽었지요. 그렇지만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되뇌며 평소처럼 공부하고 글 쓰며 지내기로 했습니다.
첫째 재인이가 올해 6살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 요즘 저는 교육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습니다. 『서머힐』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워낙 유명해 진즉에 사놓고 이제야 읽어보는 책인데, 도입 부분부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 자신을 꽤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의 자유와 부모의 권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반성이 필요했습니다.* 아이들의 인권과 자유, 아이를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바라보라는 말, 이것들을 나는 내가 당연히 이해했다 생각했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건 아닌지. 지금에 와서야 드디어 아이들을 내 소유물이 아닌 한 인간으로 온전하게 바라보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 깨달음이 제게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이제껏 마을을 왜 성인들끼리 모여 만들거라 생각했을까요. 이미 나는 마을 속에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우리가 있는 마을, ‘가정’ 속에 있었지요. 마을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함께 농사짓고 책을 읽고 요리를 하고 노래하고 춤추기.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기. 이미 아이들과 하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마을을 만들지 못해 속상했던 제 마음은 이내 확신과 행복감으로 차올랐습니다.
아이의 학교로 일반학교, 작은학교, 대안학교, 홈스쿨링을 중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 중이었던 저는 공부를 하며 차츰 홈스쿨링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여 알면 알수록 제가 살고 싶은 삶과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삶이 선명해지고 용기가 생깁니다.
아이들이 신뢰의 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게 온전한 한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랍니다. 신뢰의 공동체란 제가 말한 마을입니다. 온 마을이 아이를 키우는 일, 언제나 꿈꿔왔던 그 일을 내가 가정이라는 작은 규모에서부터, 홈스쿨링으로 시작해보자 생각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작은 규모의 마을이지만 그 속에는 이미 언제든 마을을 위해 마음을 내어줄 이모삼촌들의 온기가 들어차 있음이 느껴집니다. 그 든든함에 용기를 내어보려 합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모든 퍼즐이 한데 맞추어졌습니다. 내가 바라던 마을이 끝에는 ‘마을교육공동체’의 모습과 닮아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봤던 ‘협동조합학교’도 떠오릅니다. (다큐멘터리 <협동조합은 학교다>)
홈스쿨링을 하는 우리 아이들과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아이들이 한데 모여 함께 놀면 좋겠습니다. 우리집 아이들은 저와 아침 나들이를 다녀와서 점심을 함께 먹고,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집 앞에 모여들면 같이 신나게 놀다가 마당에 앉아 어른들이 읽어주는 책 이야기를 듣겠지요. 가끔 저녁에 다 같이 황성공원을 산책하고 샌드위치를 저녁으로 먹고 돌아와도 좋고, 옥상에서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는 건 또 얼마나 즐거울까요. 얘기하다 보니 죄다 노는 이야기뿐이지만 일단은 실컷 놀면 좋겠습니다.
주위에 이런 제 ‘OO 마을’ 이야기를 여기저기 하고 있습니다. 듣는 이들은 제게 우려를 표하기도, 지지를 해주기도 합니다. 어제는 한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선뜻 함께 해보자고 말씀해주셔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릅니다.
함께 일하는 은선과도 마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조만간 우리가 숲을을 운영하며 함께 번 돈으로 새로운 수익사업도 진행할 예정이라 같이 할 얘기가 많았지요. 한참 대화하던 중에 엄마품에서 놀고 있던 돌쟁이 들이가 갑자기 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약을 조금 먹고 놀던 참이었는데 속이 안 좋았는지. 은선은 들이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가고 나는 남아 바닥을 닦았습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느라 자리를 비우는 동안 욕조 옆에 앉아 들이와 놀아주었는데, 그날따라 부쩍 자란 아이가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너도 한 사람이구나.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았는데 어쩌면 네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의 손에 물줄기를 뿌렸습니다. 아이는 까르르 웃었습니다. 오십 번 물을 뿌리면 오십 번 웃었습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은선은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들이를 욕조에서 빼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글로 쓰면서 다시 보니 괜히 울컥합니다. 저는 이럴 때 이해하게 됩니다. 나를 포기하고 남을 돌보는 일이 결국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아직은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OO 마을도 그런 행복이 가득한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내 이웃이 되어준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