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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장 Sep 04. 2020

Dopper 텀블러

소비꾼의 도구 상자 07

무겁고, 걸치적대고, 커다랗다.
그래도 포기할  없는덴 이유가 있다.


지구를 생각해서?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단지 텀블러를 쓰는 게 플라스틱 컵을 매번 버리는 것보다 좋은 이유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엔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자는 생각도 물론 없진 않다.


어두운 골목길을 지날 때면 손에 쥐고 걸어간다. 뭔지 모를 안도감이 생긴다.



플라스틱을 얼굴에 뒤집어쓴 새의 사진을 보고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플라스틱 제조 기업 근로자들도 아마 같은 심경일 거다.



허나 그렇대도 그런 대의에 공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환경운동은 필요한 일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독립운동과 비슷한 느낌이라 "나 하나쯤이야.." 혹은 "죄책감 까지는.."에 가깝고, 특히 재미가 없다.


게다가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꺾였을 때 죄책감이 작다. 환경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다가도, 까먹고 안 들고나가서 플라스틱 컵으로 음료를 마시면 "대단한 것도 아닌데 뭐"하게 될 때가 많다.


그렇다고 플라스틱 컵을 받아 쓰면 편한가? 가장 가기 편한 스타벅스에선 종이 빨대 아니면 그냥 마셔야 되는데, 그냥 마시면 입에 닿는 입구에 커피가 너무 많이 고여 있다. 문어 같은 입모양을 하고 쫩 빨아야 고인 커피도 마실 수 있는데, 그렇게 마실 수 있는 사회인이 어디 있나. (있다면 존경한다.)

아직도 뚜껑에 남겨놓고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종이 빨대는 너무 불편하다. 나는 두루마리 휴지 속지로 커피를 마시는 세상이 올 줄은 몰랐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만, 세월아 내월아 담가 두기엔 내가 마시는 양이 많은 지

빨대가 마시는 커피가 많은지 모르겠을 정도로 많이 불어있다.

커피 맛보다 종이 맛이 세질 때쯤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예의다.

... 그런 뜻인가?


아무튼 그렇다 보니 거창하게 슬로건을 걸고 하는 환경운동을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거치적거리는 텀블러 하나 들고 다니면 나에게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게 디자인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한 때 들고 다니던 텀블러는 입구가 좁아 카페에서 내밀었을 때 민망해질 때가 많았다.


얼음을 넣느라 끙끙대는 모습을 보면 "허허.. 입구가 좀 좁죠..???" 하면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좋은 일 있으셨던 분만 "하핳..."하고 애써 웃어준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근데 그 카페에서 팔던 텀블러였다.)


그래서 이 친구가 좋다. 입구가 두 종류로 구분되어 있다. 씻기도, 얼음을 담기에도 용이하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플라스틱 컵 대신 텀블러를 들고 다니면서 좋았던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정리하자면,


온도가 쉽게 올라가지 않는다.

컵 바깥쪽에 결로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종이 빨대를 쓰지 않아도 된다.

길에서도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다.

남들 컵 반납하고 어쩌고 할 때 난 그냥 가방 들고나가면 된다.

관심받는다.


한창 여러 중요한 이야기(정치, 연애, 맛집 등)로 열을 올리고 있는 중 커피를 마셔보면 30분밖에 안 지났는데 맹물 커피를 마셔야 하는 내 처지가 처연해질 때가 있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면 그럴 일이 드물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데 맹물 커피가 될 때까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앞에 앉은 사람 표정을 확인해라. (연설이 직업이신 분들도 그렇게까지 자기 이야기 안 한다.)


이게 또 그 와중에 컵을 들면 손이 흥건해진다. 흥자 들어가는 건 손흥민이 김흥국이 아저씨 말곤 딱히 당기지 않는다. 근데 컵에 끼는 종이는 재활용 종이 쓴다고 어지간한 카페에서 제공하는 친구들은 끙아 냄새난다.

게다가 코스트 없이 둔 컵은 책상 위에 동그란 물자국을 남기는데, 그게 또 여기저기 묻어서 옮겨 다닌다.

텀블러 들고 있으면 볼 일 없다.


그뿐인가? 남들은 종이향 커피 마실 때 나는 커피 마실 수 있다.


쓰레기통이랑 반납처 찾느라 어리바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가? 이제부터 남 이야기다.


관심받는다. 관심을 안 준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분리해보자.


보자마자 와인 얘기하는 사람들 있었다. 소믈리에인 줄 알았다.


와인잔을 닮은 컵의 모양을 보면서 각자 다른 추억을 끄집어낸다. 소주파는 결국 소주 얘기한다. 뭐든 무슨 상관인가. 결과적으로 날 위해 약간의 번거로움을 참는다면(겁나 무겁다) 기대 이상으로 삶의 질이 올라간다.


그런데 그 행동이 어쩌면 미래를 바꿀지도 모른다.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면 흥미 없을 수 있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나의 삶의 질을 위해 시도해보자. 찬장에 텀블러 하나 들어갈 자리만 있어도 시도해 볼 수 있다. 포기해도 괜찮지 않은가. 누가 물어보면 텀블러 모으는 게 취미라고 하면 되는 일인데.


승모근 강화 + 호신용 도구 + 지구의 미래+ 종이 빨대 없는 세상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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