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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Jun 01. 2021

계란 프라이

계란 프라이를 기본 2개, 어떤 날은 3개도 먹을 정도로 그 부드러운 식감과 순수한 맛을 참 좋아한다. 최근 계란값이 올라 먹는 양을 줄여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계란만큼 영양이 풍부한데 저렴한 식자재도 없는 것 같아 이전과 같이 먹고 있다. 티셔츠 한 장 덜 사면될 것을 괜히 계란 한 판에 인색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있어 계란은 풍성한 식탁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결국 식구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 나는 하나만 줘.', '여보, 너무 과한 것 아니야?'

 
 급식이란 것이 없던 고등학교 시절, 점심과 저녁 도시락을 모두 들고 다녀야 했다. 저녁 먹고 야간 자율학습까지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도시락 싸고, 도시락 닦느라 엄마가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매 식사 시간마다 도시락 반찬을 펼치기가 겁이 났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무말랭이, 배추김치, 깻잎김치이거나 혹시 신경 썼다면 감자볶음을 해주셨을 테니 말이다.


 그 시절, 친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책상 두 개를 붙여 도시락을 먹었더랬다. 그래서 각자 가져온 도시락 뚜껑을 여는데, 그때마다 눈앞이 뜨거웠다. 도시락 반찬을 통해 각자의 형편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양계장을 하는 친구는 계란말이, 치킨너겟을 주로 싸왔고 밥에는 계란 프라이가 탐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반면, 내 도시락은 늘 각종 김치 종류였다. 혹 신경 쓰시면 무말랭이와 감자볶음이었다. 다 같이 펼쳐놓고 도시락을 먹으니 네 반찬, 내 반찬 한 번씩 젓가락질할 수 있는데 눈치 없이 자꾸 계란말이에 손이 갔다. 물론 두 번 이상은 안 가려고 노력했다. 대신, 내 반찬통에 있는 열무김치와 무말랭이 위주로 밥을 먹었다. 물론 집에서도 늘 먹는 반찬들이라 물렸지만, 밥을 다 먹어갈 때쯤 유난히 내 반찬통에 반찬이 많이 남으면 민망했다. 또 많이 남겨가면 엄마 마음이 안 좋을까 봐 일부러 더 내 반찬통의 반찬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나는 조금 속이 깊은 아이였다. 한 번도 부모님께 무엇인가를 더 해달라고 징징댄 적이 없다. 워낙 엄하기도 하셨지만,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눈치껏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찬 좀 맛있는 것으로 싸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내 반찬은 내가 다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특별히 신경 써서 진미채 볶음이라도 해주시는 날이면 도시락 뚜껑을 열고 의기양양해졌다. 친구들 모두 진미채 볶음이 맛있는지 바쁘게 내 도시락 반찬통을 오고 갔다. 그런 날이면 나는 일부러 내 반찬을 더 먹지 않았다. 저쪽에 슬프게 누워 있는 친구의 파김치를 집어다 먹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학창 시절 내내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친구들과 나눠 먹다 보니 생긴 배려와 예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러운 것은 부러운 거였다. 부모님이 양계장 하는 친구의 엄마는 꼭 밥 위에 노란 계판 프라이를 하나씩 올려주셨다. 밥 위에 올린 계란 프라이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그것은 같이 도시락 먹는 친구들 간의 암묵적 약속이었다.


 시골에서도 계란은 귀했다. 사람들 생각으로는 닭을 키워서 계란을 얻으니 흔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닭을 키울 때 냄새가 심해서 키우는 집이 그리 많지는 않다. 혹 키우더라도 그리 많은 양을 생산하지는 못했다. 우리 집도 닭을 키운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어쩌다 알을 낳으면 그 알들은 아빠의 몫이었다. 가장인 아빠가 이로 톡 깨서 쭉 들이키셨다.  '먹을래?'하고 물어보셨지만, 나는 날계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란은 하루에 한 알? 혹은 이틀에 한 알 정도 생산되었고 그것은 우리 집 가장이신 아빠의 것이었다. 계란 프라이가 될 순서는 오지도 않은 것이다.


 시장은 오죽 먼가? 동네 작은 슈퍼마켓도 가려면 큰 맘먹고 나가야 하고 5일장이나 가야 계란을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엄마는 계란, 고기 등의 육식동물 냄새를 싫어하는 분이셨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거의 채식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고기나 계란을 접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지금 성격 같아서는 '엄마, 계란 프라이 좀 해줘'라고 할 텐데, 어린 나는 매우 내성적이었고 눈치를 많이 봐서 혹 돈이 없는데 계란 프라이해달라고 하는 것일까 봐 내색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잘한 것인지도 모른다.

 

 친정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으시다. 희한하게도 어릴 때는 몰랐는데 몇 년 전부터 엄마가 하는 모든 음식이 다 맛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재료의 풍성함'에 있었다. 채식주의자를 지향하는 줄 알았던 엄마는  고기 요리도 엄청 잘하신다. 시골에 살던 그 시절 누리지 못했던 요리 재료의 풍성함을 엄마는 현재 마음껏 누리고 계신다.


 나는 마트에 가면 계란을 한 번에 네 판씩 산다.  네 식구가 삶아 먹고, 프라이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계란만 냉장고에 있어도 나는 걱정이 없다. 김치볶음밥 위에 턱, 빵 위에 턱, 고기 위에 턱, 비빔국수 위에 턱, 둘째 김밥 옆에 턱 올리면 금세 풍성한 요리로 변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양계장 하던 친구는 알고 있을까? 밥 위에 턱 올려져 있던 계란 프라이를 우리 모두 부러워했다는 것을? 그 친구는 밥 위에 올려져 있는 계란 프라이에 대해 어떤 마음이었을까?


 혹시 모른다. 그 누군가는 내 반찬통 속 무말랭이와 감자볶음을 부러워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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