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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Jun 08. 2021

아몬드

 생활이 여유로워지던 어느 날, 마트에서 9900원짜리 아몬드 한 봉지를 샀다. 이전에는 아몬드 한 봉지 사는 것이 부담스럽고 낭비처럼 느껴져 쉽게 장바구니에 넣지 못했었다. 돌이켜보면 아몬드 한 봉지쯤 9900원어치 사 먹는 게 큰 일도 아닌데, 당시의 나는 그 9900원이 참 아까웠다. 그 돈이면 더 효율적인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간식에 불과한 것을 굳이 그 돈 주고 사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가벼운 지갑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가 여유로워지는 것뿐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여유로운 것이 아니다. 여유롭다는 것은 '이 정도쯤이야'하는 마음이 생성되는 것이다. 생각보다 비싸게 물건을 사도 이 정도쯤이야, 갑자기 몸이 아파도 이 정도쯤이야, 아이 성적이 말도 안 되게 낮게 나와도 이 정도쯤이야, 변기에 튄 세 남자의 분비물을 보고도 이 정도쯤이야 하며 거침없이 다가가 해결한다.


 그 예민하던 내가 어떻게 변했지? 예전의 나는 변기 청소가 끔찍이도 싫었고,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더럽다고 피하기보다는 얼른 다가가 쓱싹쓱싹 닦아내고, 아파도 벌떡 일어나 식구들 밥을 차린다. 못한다고, 하기 싫다고 뒤로 빼기에는 내가 못 견디겠다. 아프고 힘들어도 벌떡 일어나 내가 해야 할 부분은 해야 마음이 편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건강한 간식을 먹겠다는 생각으로 아몬드 1kg를 사서 수시로 우적우적 씹는다. 딱딱한 녀석을 사정없이 씹어 즙을 내는 순간, 뭔가 문제점 하나를 해결한 느낌이다. 씹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오랜 시간 집에서 혼자 일을 하는 나는 말을 많이 못 한다. 사람마다 말의 분량이 정해져 있어 어느 정도의 말은 해야 속이 후련하다는데, 나는 그 분량을 늘 채우지 못한다. 아들 둘이 있고 남편이 있으나 매일 보는 사이에 뭐 할 말이 많겠나.. 어쩌다 친구와 통화라도 하면 서로 자기 말을 하느라 바쁘다. 내가 그렇듯 친구도 할 말이 참 많은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글쓰기를 좋아해,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써 내려갈 수 있으니 다행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속으로 말하면서 글을 쓴다. 지금 이 순간도 내 입 속 혀는 말을 하느라 움직이고 있고, 손은 글로 써내느라 바쁘다. 글쓰기는 정말 유익하다. 다른 사람과 쓸데없는 말을 해 감정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이처럼 글로 풀어 마음의 뿌듯함도 안겨주니 말이다.


 글쓰기는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해 나를 비참하게도 만들지만, 외롭고 힘들 때 마음을 풀어주는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다. 나이가 더 먹어도 내 주변에 사람이 많이 남지 않아도 나는 믿는 구석이 있다. 글쓰기! 글쓰기가 내 친구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어떤 주제든 쓰겠다고 마음먹으면 쓸 수 있으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말이다.


 딱딱한 아몬드를 씹으며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지금 쓰는 나의 글이 혹 쓸데없는 글은 아닌가,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 말이다.  혼자 쓰고 있음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브런치도 참 감사하다. 힘든 순간마다 이웃 작가님들의 글이 올라오고 그분들의 좋은 글들 앞에서 나는 더 배워야 함을 깨닫는다. 본 적 없지만 그들의 글을 통해 그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도 알 수 있어 감사하다. 이처럼 인생은 감사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도 더 성공하지 못했음을, 더 잘 나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날들이 있다. 9900원짜리 아몬드 한 봉지도 마음껏 사 먹지 못했던 시절을 지나, 무엇이든 척척 살 수 있은 여유가 생겼는 데도 말이다.


 욕심이 끝이 없다. 하나를 얻으면 두 개를 갖고 싶다. 아몬드 한 봉지를 마음껏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다음에는 더 큰 것을 사고 싶어 진다. 이미 가진 것은 그저 그렇게 취급하고 갖지 못한 것을 더 크게 보며 아쉬워하는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위로가 되고, 한편 덜컥 겁도 난다.


  나는 요즘 자꾸만 모든 일들이 잘 될 것 같은 희망에 부풀어져 있다. 인생이 확 바뀔 만한 일은 없지만 기분이 그렇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오뚝이라는 기업에서 개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작은 상을 받아서 그런 것 같다. 약 5500여 개의 원고 중 66개가 뽑혔는데 나는 거의 가작에 가까운 상을 받았다. 어디 가서 자랑하기도 힘든 등수라 그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꾸만,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는 거다. 큰 상도 아니고 66개 중 한 명인데 왜 자꾸 푼수처럼 기분이 좋아질까 생각해보니 '희망'이 발견되었다.


 희망
 
 '아주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구나. 한 번 해봐'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 같은 희망 말이다.


 아몬드를 마음껏 먹어도 될 정도의 여유가 생긴 나는 누군가 내 글을 봐주길 기다리며 글을 쓴다. 앞으로도 쓸 예정이다. 써야 내가 살아질 것 같다. 글 중독일까? 헛된 욕망을 따라 집착하는 것일까? 뭐든 이 모든 과정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소중한 끈이라 여겨진다.


 아몬드를 씹으며 마음속 문제 하나를 씹어 넘기는 지금,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다. 이 에너지로 다시 힘내어 정진해보려 한다. 글쓰기든, 아몬드든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은 무조건 감사하다.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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