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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Dec 11. 2020

오늘의 성장

무심코, 특별히 바라보기

 알약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고, 생수 한 잔 마시면 '오늘'이 시작된다. 1년 전에는 없었던 루틴이다. 챙겨 먹어야 할 영양제들의 순서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근거를 만들어 아침에는 종합비타민, 오메가 3, 유산균을 저녁에는 비오틴과 비타민D, 미네랄을 챙겨 먹는다.


 내 몸 내가 아끼는 것이 조금 민망스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아직 아이가 어린데, 마흔이다. 그리고 마흔이 넘으니 소화력이 떨어지고 머리숱이 줄어들고 있으며 종종 이석증도 온다.


 이석증이 온 것은 2020년 4월이었다. 아이 둘이 코로나로 집에 있고, 나 또한 활동을 안 하니 생활이 불규칙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 요인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그 외에는 크게 스트레스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석증은 어쨌든 노화 및 스트레스가 원인이란다. 처음 이석증을 만났을 때, 내 몸이 완전히 망가져 앞으로 힘든 인생을 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일주일 동안 메슥거리고, 토하고, 어질어질해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느꼈던 공포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후, 이석증은 8월에도 왔다. 병원에서 준 멀미약을 먹었고, 약 먹으면 나을 것이라는 이전의 경험이 있어 가뿐히 이틀 만에 극복했다. 두 번째 이석증 증상을 경험하며, 나라는 사람이 심리적인 충격이나 스트레스가 몸으로 나타나는 사람이라는 '약한 사람'아니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3일 전, 새벽 1시 30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깊은 잠을 자지 못해 아침부터 머리가 아팠다. 잠을 푹 자지 못했으니, 개운할 리 없는 몸을 이해했다. 그래서 더욱더 영양제를 잘 챙겨 먹고, 건강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실내 자전거를 탔다. 여전히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이석증 증상처럼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약상자를 열었다. 긴급처방으로 멀미약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두통약을 먹었다. 어떻게든 머리만 개운해지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멀미약을 먹으면 잠이 쏟아지고 하루 종일 몽롱한 기분이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두통약을 먹고, 열심히 자전거를 탔다. 일부러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기분 좋은 에너지를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다, 둘째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와 만화를 틀어주고 잠시 누웠다. 여전히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장이 삥~ 도는 기분도 들었다. 다시 이석증 증상이 심해질 것 같은 기분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일부러 청소기를 돌리고, 냉장고 청소도 했다. 토할 것 같은 상태를 꾹 참고.


 신기한 것은 몸을 움직이니, 이석증이 올락 말락 한 상태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완전히 천장이 삥삥 도는 증상이 오기 전에 먼저 선수 쳐서 몸을 움직이니 괜찮아지는 것인가 싶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고, 최대한 잠을 많이 잤다. 뭔가 피곤하면 안 될 것 같아 내 몸을 보호한 것이다. 무엇보다 신경 쓴 것은 '평안'이었다. 최대한 뉴스를 멀리 하고, 하늘을 많이 봤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과 희망찬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들을 봤다. '인턴'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평온한 상태다.


 늙었다. 내 몸이, 내 마음이 연약해졌다.  

 돌을 씹어먹어도 문제없을 정도의 소화력을 가졌던 나인데, 이제 저녁때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어 힘들다. 운동 따위 필요 없고 귀찮아하던 나인데, 실내 자전거 30분이라도 타야 혈액순환이 잘 되는 기분이다. 그 외에도 양말을 꼭 신고 자야 춥지 않고, 이불은 목까지 덮어야 잠을 잘 잔다. 쓰다 보니, 기가 막히다. 30대까지만 해도 전혀 걱정하지 않던 일들이다.

 무엇보다 스트레스에 취약해진 나 자신이 서글프다. 이렇게 늙어가는 것인가 싶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할 것 같아, 온라인 쇼핑으로 간식거리를 보내드렸다. 시어머니는 워낙 신식이셔서 택배 보낼 물품을 캡처해서 보내드리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핸드폰은 전화를 받고 거는 용도로만 사용하시는 분이라 어찌 택배 소식을 알릴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밤늦은 시간이라 전화하기 어려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캡처 화면을 문자로 보냈다. 그리고 '택배 보냈으니 맛있게 드셔^^'라고 문자를 썼다.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였다.

 "엄마, 문자도 봐?"

 "그럼, 문자 보지. 얘가 아주 엄마를 우습게 알아?"

 "그럼 택배물품 캡처 파일도 봤어?"

 "아니, 그것은 못 봤네"


 엄마는 문자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예상대로 엄마가 문자를 쓸 줄은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 보낸 문자를 읽을 수는 있는 사람이었다.


 미안해졌다. 나는 한 번도 엄마에게 다정한 문자를 보낸 적이 없다. 아빠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왜 그리도 부모에게 어색한 딸인 것일까. 남들에게는 살가운 문자도 잘 보내면서 말이다.

 '나는 그렇게 살갑게 사랑받으며 크지 못했다'라고 변명하고 싶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내 기억에 내 부모는 나에게 사랑 표현을 종종 했으나, 사춘기 때부터 나는 그 표현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황들이 오랫동안 굳어졌고, 내 부모 또한 '내 딸은 그러려니'하고 살아온 듯하다. 그렇다고 온전히 내 잘못은 아닌 것 같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나 또한, 언젠가는 귀찮아서 혹은 복잡해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내 예상으로는 80살 이후로는 새로운 변화가 와도 귀찮아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리고 나 또한 늙고 있음을 느끼다 보니 부쩍 늙은 부모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엄마도 문자를 본다는 것이 충격이었듯, 엄마 또한 내게 서운했겠다. 나는 왜 엄마 핸드폰에 '가족밴드'를 깔아줄 생각도, 문자 쓰는 법을 가르쳐줄 생각도 안 했을까. 우리 엄마는 당연히 그런 것 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꼭 가르쳐주고 싶다. 전화통화가 아니어도 문자로 마음을 전할 수 있음을.


 늘어가는 영양제 숫자만큼, 한 인간으로서 성장해가는 나를 느낀다.

 이석증을 관리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은 것과 엄마에게 종종 문자를 보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 오늘의 '성장'이다. 나이도 공짜로 먹는 것이 아니라더니, 마흔이라는 나이가 새삼 뿌듯하다.


 무심코, 특별하게 바라본 영양제를 통해 나는 지금 브런치 글을 썼고 끝맺음을 하며 평안을 얻었다. 뿌듯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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