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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Oct 10. 2019

'처음'이 지나간 자리


 책이 나왔다. 출판사 주소가 적힌 상자를 뜯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다. 상자를 여니 하얀 바탕에 빨간 글씨가 선명하게 박힌 책이 산뜻함을 뽐내며 누워 있었다.


 두 권이었다. 출판사 대표님이 책 두 권을 넣어 보내셨다. 두 권이라 야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펼쳐 들고, 처음으로 한 행동은 책의 가장 뒤편을 뒤적여보는 것이었다. 그곳에 내 이름이 있다. 편집인 옆에 살포시. 내 이름 석자를 발견하고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책의 저자란에 내 이름이 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이 책은 재테크 서적이고, 내 인생 최초 편집에 관여한 책이다. 그만큼 각별하다. 그러나 이 책으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1년 넘게 느꼈기에 '애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아무래도 첫 편집이라 부족한 면이 많은 나였기에, 출판사 대표님으로부터 '잘 좀 하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고 그로 인해 대내외적인 갈등이 컸다. 무엇보다 교정교열과 리라이팅의 경계가 모호하여 업무에 차질이 많았다. 단순 교정교열로 하자니 전체적인 문맥이 이상하고, 리라이팅까지 하자니 원작가가 느낄 불쾌감 그리고 계약 범위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쉽게 말해, 나는 리라이팅 범위까지의 계약금을 약속받지 못했다. 그러나 대표님은 교정교열과 리라이팅의 아슬아슬한 범위까지의 편집을 원하셨다. 이처럼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내가 아무리 교정교열을 반복적으로 잘해서 보내도 대표님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


 결국, 책이 나오기까지 1년이 걸렸다. 작업 속도가 빠른 편인 나는 이 책의 교정교열을 두 달만에 다 해서 보냈다. 그러나 나머지 10개월 동안 대표님과 눈치싸움을 해야 했다. 대표님은 '더 고쳐라. 아직 미완성이다.'라고 하셨고, 나는 '더 이상 고칠 게 없다. 이미 완성이다.'를 외친 것. 그러나 난 을이었다. 다시 하라면 다시 할 수밖에 없는.

 무엇보다 책이 출간된 뒤 돈을 받겠다는 계약서를 썼기에 나는 무조건 대표님의 요청에 따라야 했다. 돈은 받아야하니까.


 어찌 되었든, 책이 완성되었고 출판되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애를 태운 끝에 결국 나온 것이다. 책을 받아 들고, 원작자는 자료를 제공했을 뿐 내가 쓴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솔직히 편집자로서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편집자의 양심상 절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책이 예쁘게 나와서 참 다행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 사람처럼 책을 내는 작가가 되어야지.'라고 말이다.


 무엇보다  편집자로서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것에 뿌듯함과 자신감이 생긴 것이 내게는 큰 수확이었다. 또 편집자의 애환도 충분히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후, 나는 이 책의 편집인이라는 간판을 이력서에 내걸고 다양한 종류의 교정교열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첫 편집은  참 감사한 기회로 기억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바라보는 목표가 같아도 그 목표를 향한 기대치와 여정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일을 시작하거나 계약서를 쓸 때, 바라보는 목표 및 여정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려 애쓴다. 예를 들어,


 "제가 5페이지 정도 작업해서 보내드리고 연락드리면 다음 날, 바로 피드백해주세요. 계속 그 방향으로 해도 좋을지  알아야 하니까요. 대표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따로 있으시다면 주시는 예시대로 해드릴게요."


 라고 말이다. 솔직히, 편집 일을 하면서 느꼈던 답답함 중 하나는 '느린 피드백'이었다. 작업을 1차적으로 해서 보냈을 때, 담당자가 확실히 노선을 정해주면 나 또한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다. 그런데 워낙 출판 쪽 일이 많다 보니, 담당자의 피드백이 늦어져 나중에 다시 뜯어고치는 일들이 많았다. 그로 인한 피로감과 스트레스는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 경험을 해보면 그 일을 할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어떤 돌발상황이 있을지 예상하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출산과 첫 육아를 경험해 본 여자는 둘째, 셋째를 키울 때 힘들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못한다. 둘째, 셋째가 유독 순해서일까? 아니다. 첫째 때 겪었던 시행착오와 경험들이 있기에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는 하나의 예일 뿐, 인생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 처음에는 잘 몰라서 헤매지만, 두세 번 반복하면 더 좋은 방법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도전' 앞에 가슴이 설렌다. 처음에는 어설퍼서 어두운 골목을 헤매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밝은 길을 걸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편집자로 일하며 경험했던 시행착오들이 이제는 제법 추억이 되었다.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들로 흰머리가 늘어날 만큼 괴로웠는데, 이제는 나의 경력이 되었다.


 이렇게 내 이야기를 쓰고 있는 이 순간도 훗날 '좋은 기억, 좋은 도전'으로 남길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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