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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Dec 14. 2023

미증유의 사계

   

지난 11월,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가 밴쿠버에 방문했다.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이하 VSO)와 협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단독 콘서트는 아니었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손열음 씨의 모차르트 연주 직관의 기회인데 안 갈 이유가 없었다. 티켓을 예약하고 며칠 뒤. 아이의 기침이 시작되었다. 공연 시작 전 까지 낫길 바랐지만, 기침은 호전되질 않고 점점 더 박력이 넘쳐갔다.     

 

결국 티켓 환불 요청 이메일을 썼다. VSO측은 환불은 불가하고 다른 공연으로 바꿔줄 수는 있다고 했다.  

   

비발디의 사계

아, 비발디의 사계라니. 식상하다 못해 공연을 보기도 전에 벌써 지루하다. 나는 살면서 비발디의 사계를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겨울 2악장은 이제 비발디의 곡이 아닌 가수 이현우 씨의 곡 같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음악도 비발디의 사계라고 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사계에 절었어도 나보다 사계를 덜 탄 아이를 위해 비발디의 사계로 티켓을 변경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일요일 오후 2시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장소가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내에 있는 공연장이라는 것도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 공연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대학교 투어도 하고 카공족들이 바글거리는 후끈한 열기 속에서 점심도 먹었다.  


    

훼방꾼

공연 시간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주변 자리에 사람들이 속속 채워지는 와중에 거대한 난관을 마주했다. 아이의 바로 앞자리에 한 남자분이 앉았는데, 향수를 엎지른 게 아닌가 싶은 정도의 강력한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 바꿔 앉을 자리가 있을까 탐색했지만 거의 만석이라 피난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곧 공연이 시작되었다. 비발디의 사계는 2부 공연이었고 1부에서는 캐네디언 작곡가 Mozetich의 Angels in Flight를 챔버로 연주했다. 전체적으로 몽환적인데 카리스마를 잃지 않는 힘 있는 곡이었다. 보는 재미도 있었는데, 바이올린 두 대와 비올라 한 대의 활이 마치 군무를 추듯 움직였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아이를 보며 “멋지다!!”라고 내가 말했다. 아이는 사춘기 특유의 성의 없는 긍정이 아닌,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희를 뿜어내며 끄덕였다. 엄마 대만족.     


장난이 언제 끝날까?

신기한 건 1부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경악스러웠던 향수 냄새를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은 향수입자의 공기 배회마저도 잠시 멈추나보다.      


인터미션 동안 무대는 사계를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다시 연주자들이 입장을 하고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의 고갯짓을 시작으로 봄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사계와는 느낌이 다르다. 이것이 직관의 위엄인가보다.      


무대에 가까운 자리여서 몰입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런데 새들이 지저귐을 주고받는 와중에 내 몰임의 흐름을 끊는 훼방꾼이 나타났다. 두 칸 앞 열의 오른쪽 대각선 자리에 앉은 9살 정도 된 개구쟁이였다. 옆 자리의 여동생과 투닥 거리다가 엄마에게 제지를 당하자 자기의 왼쪽에 앉은 이모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또 다른 훼방꾼

장난이 끝나야 비로소 다시 공연에 집중할 수 있다면 나는 환경에 수동적인 사람일 것이다. 자꾸만 개구쟁이에게 가는 신경을 그러모아 무대로 던졌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공연자들의 현란한 활 짓에 집중이 되었다.      


삐걱삐걱! 다시 집중이 끊겼다. 

이번에는 같은 라인에 앉은 누군가의 의자가 삐걱거리는 잡음을 음악에 섞는다. 덩치가 좋은 아저씨이다. 그 아저씨가 조금씩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유난히 삐걱이는 소리가 크게 난다. 보스 헤드셋 처럼, 심상의 노이즈 필터를 활성화시켜본다.   

   

자기만의 연주에 집중

살다보면 다양한 장면에서 중요한 순간의 훼방꾼을 만난다. 훼방꾼의 목적은 의도적일 수도 있고 의도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 대부분은 자기가 훼방을 놓고 있다고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무의식중에 다리를 떤다거나 습관적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훼방꾼이 나타나면 그 거슬리는 행동을 멈출 때 까지 못마땅해 하며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훼방은 내가 멈추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다. 타인의 행동을 훼방이라고 해석하는 것부터가 내 선택의 영역이다. 타인의 행동이 내 통제의 영역이 아니라면, 나는 선택해야 한다. 훼방꾼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될 것인지, 의식을 의도적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할 것인지.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몰입하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리히테르가 스페인 라이브 공연에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연주하는 내내 관객석에서는 기침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리히테르가 벌떡 일어나서 기침 좀 그만하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는 최고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연주했다. 


공연을 보는 동안 세 번의 훼방을 해석했다. 나의 삶에 난입해 들어오는 무수히 많은 훼방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나는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인가.      


식상함에서 미증유로

지루할 것만 같았던 사계는 현장감이라는 MSG가 듬뿍 쳐지면서 새로운 매력으로 되살아났다. 오케스트라가 선택한 앵콜 곡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였다. 바흐의 음악은 무조건 좋아하지만 이 곡도 사계처럼 식상해서 듣지 않는 곡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지 F#으로 시작하는 첫 음에서부터 나는 엄청난 힐링감에 압도되었다. 5분간의 연주가 진행되는 내내 울먹거리다가 연주가 끝나자마자 눈물을 툭 떨궜다.      


이미 향수냄새는 다 휘발되었고 나에게 남은 것은 무대 위 연주자들의 열정과 아름다운 선율, 그리고 영혼의 위로 뿐이다. 



표지 사진 : 사계 공연이 끝나고 무대 인사



https://youtu.be/xc-II3NpRf4?si=9e2OOIlpg9pDUDB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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