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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an 03. 2024

우리 집에 없는 말

들어보지 못했기에 하지 못했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니 내가 자라온 환경을 많이 되돌아보게 된다. 내 나이 5살 때 나의 부모님의 나이는 고작 31살이었다. 내가 20대를 막 끝내고 30대 초입에 들어갔을 때를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안다기보다는 모르는 쪽에 무게 중심이 더 쏠려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 역사 공부

상담을 받으며 부모님을 ‘그’와 ‘그녀’로 보는 작업을 통해 객관화시켰다. 나의 부모님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사는 어떤 남자와 여자로 놓고 보는 작업이다. 부모님의 가정환경을 살피고 조부모님의 양육방식을 살펴본다. 그리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역사적 배경까지 한바탕 아우르고 나면 부모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우리네 조부모님들께서 그들의 자식, 즉, 나의 부모님 세대를 양육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삶은 치열한 투쟁이었다. 한국 전쟁이 막 끝나고, 부모님과 형제, 자신들의 자식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휴머니즘이나 인간의 정서를 보듬는 일은 사치였을 것이다. 친할머니는 4명의 자식을 낳고 두 명을 잃으셨다. 약을 제때 먹이지 못해서였다고 들었다. 둘째였던 나의 아빠는 졸지에 첫째가 되었고 영재 동생과 늘 비교를 당하며 평생을 사셨다.      


외할머니는 한글을 읽지 못하셨다. 5남매 중 세 아들만 감싸고돌아 엄마와 이모는 늘 소외받았다고 했다. 나의 엄마는 그 여파로 세상에서 무식한 사람이 제일 싫다고 하셨다.    

  

사랑한다는 말, 괜찮다는 말,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자라지 못한 나의 부모님은 나와 동생에게도 그 말을 해주지 못하셨다. 자연스럽게 나 역시 나의 아이에게 그 말들을 해주지 못했다.      



언제나 괜찮지 않았고,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내 삶의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모님이 맞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아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했으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애정결핍이 내 지금 어떠한 과오의 면죄부가 되어줄 수는 없다.      


날아간 거미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있다. 나의 아이가 다른 사람한테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싫은 소리를 꺼낸 당사자한테 직접 따지자니 공격이 되거나 싸움이 될 거 같았다. 그 상대가 남의 집 아이면 더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 입이 사라진 사람처럼 대꾸하지 못했듯이 내 아이가 유쾌하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친구들과 아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의 아이가 거미가 날아갔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의 딸 중 좀 큰 아이가 “야!! 거미가 어떻게 날아가냐?”라고 건너 자리에서 화살을 쏘았다. 일타이피. 나와 아들에게 명중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친구가 자기 딸을 나무라기를 바랐지만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워낙 시끌벅적한 자리였기에 그 일에 그다지 집중이 되지도 않았다. 나 혼자 그 일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을 뿐이다.   

   

상담선생님께 이 일화를 여쭤봤을 때 선생님께서는 ‘아이의 편이 되어주면 된다’고 하셨다. “아, 그래? 거미가 날아갔어? 그렇게 보일 수 있었겠네~” 그렇게 하면 남의 집 아이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아이의 편이 되어주니 공수가 완벽하게 균형을 잡게 된다.      


약간의 진화

이론은 알지만 막상 현실에서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상담을 받은 후에 아는 동생 집에 놀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초등 남자아이들끼리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야구 게임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게임에 나의 아들은 연속으로 헛스윙을 했고 다른 집 아이는 그걸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나의 지인이 너무 웃는 거 아니냐고 자기 아들을 나무라자 그 집 아이는 “저 형이 너무 못하니까 그렇지.” 하며 자기가 웃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좋은 기회가 왔다.

      

나는 나의 아들에게 “괜찮아, 처음 하는 게임인데 못할 수 있지, 좀 못해도 상관없어.”라고 말해주면 되는데 그 말이 생각이 안 났다. 기껏 내가 한 말은 그 집 아들에게 “네가 너무 웃으니까 웃길라고 형이 더 그러나 보다.”였다. 입이 소실된 사람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무슨 말이든 하긴 했지만 영 개운치가 않았다. 공격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방어적이되었다. 


집에 와서 아들에게 물어보니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한 걸 못 들었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음에는 꼭 내 입에서 괜찮다는 말을 뽑아내리라고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도 직접 들었다

2023년 12월 31일, Van Dusen Botanic Garden에서 마련한 Night Light 이벤트를 보러 다운타운 근처까지 갔다. 주차장은 이미 꽉 차서 모든 차들이 인근 주택가에 주차를 하고 있었다. 나도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아이와 행사를 보고 나왔다.      


집에 가야 하는데 차가 있었야 할 마땅한 곳에 차가 없었다. 나는 바로 어떠한 이유로 견인이 되었는지 알았다. 소화전에 너무 가까이 주차를 했던 것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 교통경찰에게 도움을 구했고 그는 견인회사의 전화번호도 알려주고 택시도 불러주었다. 외모가 산타할아버지 같았는데 보기 드물게 겉과 안이 같은 사람이었다.      


23년 마지막 날의 이벤트를 아주 임팩트 있게 마쳤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행사장에서 찍은 화려한 전구 장식 사진들을 카톡으로 보냈다. 차가 견인되어서 엄청난 돈을 내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남편에게서 답이 왔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고생했어요


남편의 카톡을 보고 나의 세포와 시간은 온전하게 일시정지 되었다. 내가 못 들어본 말, 그래서 하지 못했던 말을 남편이 나에게 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들어본 말이 되었으니 나도 잘할 수 있겠지. 





표지그림 : Pamela Cornell,  British 1928-1987 -  Family in the orang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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