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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Feb 18. 2024

누가 어른인가

부끄러움을 끝내는 방법


오래전, 친정 엄마의 지인 중에 엄마보다 열 살 정도 젊은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불광동에 살았고 아이들에게 화를 많이 낸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불광동 휘발유’가 되었다.      


엄마가 그녀의 집에서 목격한 초등 딸과 엄마의 갈등은 아이와 아이의 싸움이었다. 누가 엄마고 누가 딸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막상막하였다고 엄마는 전했다.      



결혼 전, 친정 엄마는 나를 보며 “꼭 국민학교 4학년 짜리 같아.”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우리가 캐나다로 옮겨 왔을 때 아이는 Grade 3였다. 당시 나의 정신연령은 여전히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다. 신체적으로는 충분히 성숙했고 지적 활동도 웬만큼 수행했다. IQ는 낮지 않았지만 정서지능만큼은 현격히 낮았다.     


나는 브런치의 자기소개란에 나를 ‘재양육’ 중이라고 적어 놓았다. 아이의 학년은 올라가고 머리는 커지는데 언제까지고 초4 수준의 정신머리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캐나다에서 아이는 팬데믹으로 인해 Grade 3을 제대로 등교하지 못하고 Grade 4를 맞이했다. 새 학년 새 반을 배정받는 첫날 아침이었다. 학교 운동장에 학급 표지판을 세우고 아이들이 그 뒤로 줄을 서고 있었다.  

    

아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발견한 표지판 뒤로 가서 줄을 서려고 했고 아이는 거기가 아니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어쩌면 긴장은 아이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듯했다. 나의 입에서는 “어쩌라고~”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은 어떻게 봐도 엄마가 아이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딱 동급생 내지는 동생이나 할 법한 말이었다.   

   

먹이고 입히는 것은 잘할 수 있었지만 정서적으로 아이를 지지해 주고 보호해 주는 일은 0점에 수렴했다.    

  

부끄러운 과거는 또 있다. 내가 21년에 술을 끊겠다고 몇 개월을 참았을 때 일이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아이와 나들이를 다녀오고 나니 차가운 화이트와인 생각이 절절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티브이를 보다가 내가 입을 열었다.      


-엄마 와인 한 잔 마실까?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 마시고 싶으면.     


누가 누구에게 허락을 받고 누가 누구에게 허락을 하는가?     

 

어떤 엄마는 아이에게 자신이 술을 마시고 싶어 하면 말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어떤 엄마의 아이는 엄마가 오늘 자기를 오래 기다려줬으니까 맥주 한 캔 허락한다고 했단다. 그 말에 그 엄마는 냉큼 편의점으로 달려가 맥주를 사다 마셨다고 한다.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이인가?    

  

말할 것도 없이 엄마가 어른이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아이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칭찬한다. 손이 안 가서 좋겠다거나 의젓하다고, 엄마를 도와준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어른스럽지 못한 부모 탓에 아이는 강제적으로 성장해 버린 것이다. 유년기에 누려야 하는 것을 상실한 채.   

 


또한 어른은 아이와 싸우지 않는다. 온라인에서는 아이와 같이 맞서서 악을 쓰며 싸웠다는 글을 자주 본다. 아이 나이가 불과 6살, 7살인데 성인 여성이 같이 언성을 높여서 싸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춘기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살아봐야 겨우 십몇 년 산 아이들이다. 3, 40대 성인이 그런 아이들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정신 수준이 고만고만하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어느 주차장에서 십 대 아들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엄마를 본 적이 있다. 싸우다가 악에 받친 엄마는 급기야 바닥에서 절하는 시늉까지 했다. 그 옆에 고작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둘이 엄마를 붙잡고 말리고 있었다. 큰 아이는 결국 돌아서서 뛰어가 버렸다.      


나는 먼발치에서 처참한 장면을 지켜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동년배 남녀 커플의 싸움이어도 혀를 내두를 그야말로 테러 수준이었다.      


엄마도 사람이기에 화가 날 수 있다. 엄마라는 일이 처음이기에 서툴고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말과 행동에 감정으로 맞짱을 뜨는 것은 어른의 행동이 아니다.      


다시 ‘불광동 휘발유’를 불러와 글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그렇게 딸과 박 터지게 싸우던 ‘불광동 휘발유’는 가족 상담을 받으며 심리공부를 시작했다. 현재는 어느 센터에서 심리 상담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녀는 아이와의 전투를 멈추고 자신을 ‘재양육’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이와 싸우는 것도, 아이에게 결정권을 위임하는 것도 부모가 할 일은 아니다. 모든 부모가 상담사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재양육할 필요는 있다. 

 

당신의 가정에서 아이와 당신, 둘 중 누가 어른인가? 




표지그림 : Carl Larsson,  <Father, Mother And Child>,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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