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도 빠짐없이......
세상에 절대 진리가 있다면 생명체는 언제고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 외의 또 다른 진리는 누구도 비켜가지 못하고 늙는 '노화'이다. 아무리 얼굴에 금실을 넣고, 두피를 당기고, 주사를 맞고, 레이저를 맞아도 사람은 모두 늙는다.
젊을 때는 이 푸릇푸릇하고 활기차고 탱탱함이 영원할 것만 같다. 노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노인을 멀리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는 가로세로로 편 가르기, 구별 짓기이다.
남혐여혐, 노키즈존, 노인에 대한 혐오 발언인 '틀딱', 중장년층을 비하하는 '꼰대', 요즘 것들의 대명사 'MZ 세대'라는 등으로 덩어리 지어 나누기를 한다.
한국은 2020년에 들어서며 베이비붐 세대가 노년기에 진입했다. 고령인구의 비율은 급등하여 2025년이 되면 본격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100명 중 약 20명(이상)이 65세를 넘은 노인인 것이다.
노화과정에는 생물학적이고 보편적인 일차적 노화가 있다. 피부의 탄력이 저하되고, 노안이 오며 흰머리가 늘어난다. 외부의 요인에 의한 이차적 노화는 외적 요인에 의해 가속화되는 노화이다. 뇌나 근육을 너무 안 써서 퇴행하거나 흡연이나 음주가 지나쳐서 건강을 해치는 것 등이다.
감각이 둔해지고 시력이나 청력이 감퇴한다. 이러한 상실로 인해 성격이 변화할 수도 있고 심리적인 장애를 얻을 수도 있다. 뇌의 정보처리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지각의 폭이 감소하게 된다.
새로 얻는 정보들이 빠르게 습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급변하는 사회시스템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진다. 당장 버스표를 구입하거나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려고 해도 사람이 아닌 낯선 자동결제기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게 된다.
사람의 기본 체질이나 생활습관에 따라서 차이가 나겠지만 65세 정도가 되면 무언가 병을 치렀거나 지금 치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45세 이후가 되면 만성질환을 한 두 개 정도는 갖게 된다고 하니 65세에는 말할 것도 없겠다.
얼마 전에 부모님의 '이상한 고집'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나이가 들면 변화가 두려워 경직성이 증가한다. 고집이 세지는 것이다. 익숙하고 친근한 것에 애착을 느껴서 그것이 아무리 낡은 것이더라도 버리기가 어려워진다.
젊은 사람도 몸이 아프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자신감이 저하되게 마련이다. 고전적 노화이론에 의하면 노년기에는 젊을 때와 똑같은 사회적, 심리적 틀에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의 변화된 상황에 맞는 틀로 재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의 폭은 점차 좁아진다. 좁아진다기보다는 나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사람들만 남겨놓게 되는 것이다. 원치 않는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며 정서를 갉아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취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도전이다. 도전은 다른 의미에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것은 건강한 스트레스이다. 노년기에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친정엄마에게 건강한 스트레스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제안했을 때 엄마는 자신 없어하셨다. 그런 엄마를 보고 솔직히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내 딴에는 조금 더 재미있는 삶을 사시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발달심리학'과 '건강심리학'을 수강하며 친정엄마의 내향적 태도에 대해서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노년기', '어르신'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왜 그들이 경직된 사고로 고집을 부리는지 노화에 대한 이해를 하기 보다는 그저 미워하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영원히 늙지 않을 것만 같은 청춘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작은 글씨를 멀리 놓고 봐야 보이는 때가 성큼 다가온다.
성공적 노화를 위해서는 노인 스스로의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책의 수립과 노인 폄하에 대한 인식의 개선이 필요하다.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 그까지 알아야겠니?'라며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노화와 노년기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노년기에 대해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결국 미래의 나를 위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표지그림 : Grant Wood, <American Gothic>,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