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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16. 2023

확 놓아버리고 싶을 때

5, 4, 3, 2, 1

 저녁에 외식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놀랍게도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쌓여있다. 그리 놀랄 거 없다. 점심을 먹고 움직이기 귀찮아진 1시의 내가 7시의 나에게 양보한 일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1시의 나만 그런 마음을 느낀 건 아닌 거 같다. 7시의 나는 귀찮음 + 회피 궁리가 생긴다.




아, 귀찮다.
벗어나고 싶다.



가끔씩 밑도 끝도 없이 나를 확!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어느 날 이웃나라 병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이닥치는 기분이다. 막을 새도 없이 선을 넘는 이런 무력감이 들면 단단하게 서 있는 나를 쭉 뽑아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 같은 곳에 던져버리고 싶다. 체념이라는 마음의 변종이다.


이럴 때는 평소에 가치 있게 여기던 나의 신념이나 확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내가 정해놓은 우리 집의 규칙인 저녁 8시 이후 미디어 시청 금지를 파기하고 범죄 수사 유튜브를 보고 싶어 진다. 아니면 불륜 예능을 보면서 관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 진다.


마리 루티의 <가치 있는 삶>에서 현대의 사람들은 실용주의를 따른다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깊이 쏟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인생을 즐기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에서도 이러한 맥락의 이야기를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이라는 소비사회의 특징적 신념은 고통의 빠른 해소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채우고 싶다는 정신적 공허감을 느낄 때가 있다. 현대의 사회는 그러한 충동에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시 TV를 켜고 무념무상으로 빠져들거나 쾌락 물질을 탐닉하는 것이다.


 이런 기분을 언제 자주 느꼈는지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건 바로 술을 많이 마실 때였다. 아주 무기력하고 불감한 정신이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 않다. 어둠의 저편으로 힘껏 등을 밀어서 온전한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킨다.


 술을 마시던 때에는 가슴 한 켠이 뻥 뚫린 것과 같은 공허감이 자주 엄습했다. 이럴 때는 망설일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와인 병을 따서 입을 축인다. 그러면 역시나 내가 원하던 그곳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다.


 책임감, 약속, 의무 같은 것들은 곱게 접어 벼랑 끝에 놔두고 절망감, 뻔히 보이는 후회 등을 끌어안고 뛰어내린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중독자가 맞는구나 싶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인지하면서도 '아몰라'정신으로 무장하고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이제와 소름이 끼친다.


마리 루티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성격은 항상 상실이 남긴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라고 한다. 옛 기억에 사로잡혀 다시 특정 시나리오의 꼭두각시가 될 필요가 있을까? 사람에게는 선택을 할 힘이 있고 그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인생 시나리오를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내가 경험한 바, 특정한 과거의 유산에 얽매여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서 큰 위안을 얻고 있다.


 술을 끊은 지 1년이 넘은 지금은 영적 공허함에 술로 다이빙을 하고 싶은 충동은 사라졌다. 하지만 청명한 날, 개와 늑대의 시간이 다가오면 마음의 창 밖에서 예의 그 ‘확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접근할 때가 있다. 그가 슬그머니 존재감을 드러낸다. 창문을 좀 열어달라고 노크를 한다.



아, 너 왔구나.

어쩌지,
난 창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는데 말이지.



이럴 때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배웠다. 박상미 심리학자는 한 영상에서 무기력과 우울에서 빠져나오는 소소한 매뉴얼을 가르쳐준다. 그중에서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 카운트 다운 구호이다.  "5, 4, 3, 2, 1"을 외치고 행동 개시!!! 마법사의 주문이라 여기고 실천에 옮겨보니 상당히 도움이 된다.


이미 마음을 꿀꺽 먹었다면 숫자를 세어본다. 카운트 다운을 하며 정신과 몸의 세포에 긴장을 끌어올려 움직일 준비 시간을 준다. 내가 해보니 10은 좀 많다. 10을 세는 중간에 교묘한 합리화가 툭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박상미 님 말씀대로 5를 추천한다. 5, 4, 3, 2, 1 움직여!! 를 외치고 1시의 내가 7시의 나에게 일임한 설거지를 하기 위해 움직인다.


 내가 책임지고 해야 하는 아주 작은 일이지만 미루지 않고 시작하니 기억의 창 너머에서 기웃거리던 그 녀석은 풀이 죽어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 돌아서는 그 뒷모습에 일종의 연민 같은 것도 일지 않는다. 오히려 뿌듯한 성취감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실수를 잊지 않는 것이다.


술로 점철된 과거의 시간, 술로 빚어낸 실수를 외면하거나 잊으려고 하지 않는다. 특별히 회상이나 추억, 향수라는 예쁜 말로 포장해주지도 않는다. 내가 그 실수를 잊었다면 갑자기 나를 확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나는 다시 같은 트랙 위에 올랐을 것이다.


공허감을 느끼는 것도, 무한 귀차니즘에 빠져드는 것도 내가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의 한 줄기라고 인정한다. 불안이나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단히 큰 일을 해내지 않아도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주 작고 소소한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을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린다거나, 설거지를 다음 날로 넘기지 않고 해치우는 것만으로도 나를 확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놓아버릴 수 있다.




5, 4, 3, 2, 1

움직여!!

 

 





표지그림 : 앙리 마티스, <Dance>, MoMA 직찍, 예술을 사랑하는 지인 찬스 - 허락없이 사용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참고자료 

<가치 있는 삶>, 마리 루티, 을유문화사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캐롤라인 냅, 나무처럼

유튜브 놀심, 심리학자 박상미 편

https://youtu.be/eltheDr8P34?si=E7kDkq-jwyTgw3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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