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Sep 11. 2023

걱정이 걱정이야

불안한 유기체의 운명


아이가 다니는 태권도장의 길 건너편에는 주유소가 있다. 우리가 태권도장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주유소에는 탱크로리가 급유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아이가 물었다.     

 

아들 : 엄마, 저 안에 기름이 있는 거지?

나   : 응

아들 : 저거 터지면 어떻게 해?

나   : 걱정돼?

아들 : 응

나   : 저 주유소에 지금 불이 나서 터지지 않을 확률은 99.8%이고 터질 확률은 0.2%야. 그 0.2%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너는 지금 태권도를 하면 돼.     

 

나는 아이의 등을 두들기며 도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전자에 불안을 새기고 태어난다. 그리고 부모와 사회로부터 불안을 학습한다. 나의 원가족은 유난히 불안도가 높다. 내 동생의 어린 시절 별명은 ‘기우’였다. 오죽 걱정을 많이 했으면 그 어린 나이에 별명이 ‘기우’였을까 싶다.      


내 원가족의 걱정과 불안을 듣고 있으면 사실과 상상의 경계가 완벽하게 허물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뉴스나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가 곧 나의, 우리 가족의, 주변에 누군가의 일이 될 것이라고 걱정을 한다.     

 

‘기우군’은 자라서 ‘기우저씨’가 되었다. 수년 전, 가족 여행을 가자고 누군가 제안을 했을 때 올케와 나는 ‘하와이’에 가자고 성화였고 내 동생은 진지하게 하와이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가 왜냐고 물으니 하와이에는 ‘상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우저씨는 궁서체였다.       


나와 올케는 아무 말 없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네가 책임져’하는 표정으로.      



일상생활에는 다양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가스불을 끄지 않고 나갈 수도 있고, 휴가를 가면서 창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할 수도 있고, 자동차 타이어가 터지는 바람에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다.    

  

일부는 미연에 방지를 할 수도 있다. 부모님이 사시는 집 현관에는 코팅된 A4 사이즈 종이에 큼지막하게 [가스불!!!]이라고 쓰여있다. 가스불은 정말로 위험하다. 내 친구는 행주를 삶는다고 가스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깜빡한 채로 슈퍼에 갔다. 집에 돌아왔더니 행주를 담은 큰 냄비 속에 행주들이 불타고 있어서 가정용 소화기로 화재를 진압했다고 한다.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친구 집 현관에도 친정집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을 주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부주의에서 비롯되는 일이므로 예측 가능하고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불안은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다. 불안해야 위기의식을 갖고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과도한 불안이다.


불안의 이면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타인과의 비교다. 아이를 낳고 맘카페에 가입했을 때 ‘뒤집기’의 시기에 대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자기 아이가 뒤집기를 안 한다고 걱정하는 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왔다. 그 시기가 6개월 7개월도 아니고 4개월인데 안 뒤집는다는 것이다. 아기의 뒤집기는 3~4개월 무렵 가능해지는데 문제는 4개월이 커트라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집 아기들은 다 뒤집는데 나의 아기가 4개월을 넘기면 안 된다는 조급함이 엄마들의 불안을 야기한다.      


두 번째는 상황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변한다. 나의 아들은 아기 때 몸무게가 많이 나갔다. 전국 유아 상위권이었다. 친정 부모님은 소아 비만을 걱정하셨고 분유를 그만 줘라 이유식을 줄여라 등등 육아에 입을 대셨다. 반면 시부모님은 다 키로 간다고 걱정을 하지 않으셨다. 지금 아들은 키는 평균이고 몸무게가 평균보다 훨씬 아래다. 친정 부모님은 이제 다른 걱정을 하셔야 한다. 북미에서 살려면 덩치가 좋아야 하는데 손자가 너무 빼빼하다는 것이다.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   

   

세 번째는 타인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망상이다. 올해 초, 나 역시 집안 내력을 위시하며 상당히 큰 불안에 직격탄을 맞았다. 학교에서 눈을 보러 어떤 산으로 필드 트립을 간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산 정상까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고 산속 눈밭을 걸어야 하니 스노 부츠를 꼭 준비하라는 평범한 내용도 있었지만 내 불안을 증폭시킨 문구는 따로 있었다. 


[어떤 사고가 나도 선생님과 학교 측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아래에 사인해라!!라는 이 문장이 나를 미래의 망상으로 날려버렸다. 몇 날 며칠을 리프트 사고가 날 것만 같은 망상에 시달리며 불안했다. 급기야는 아들에게 꼭 필드 트립을 가야 하냐고 물었다. 아들은 그런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당연하지~!! 가고 싶어~~!! 친구들도 다 가고~~!!”라고 대답했다.     

 

사인을 한 종이를 가방에 넣어주고 마음이 편해지는 요가를 유튜브에서 찾아서 따라 했다. 뭐든 해야만 했다. 마지막에 명상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눈을 감고 내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찾아 나섰다.      


문득, 뉴스에서 봤던 리프트가 지상 몇 백 미터 상공에서 멈춘 채 몇 시간을 구조를 기다린 일, 리프트가 추락해서 사람들이 사망한 뉴스 등이 떠올랐다. 아!! 내가 이 뉴스에서 본 일을 마치 내 일처럼 여기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 그게 얼마나 흔하지 않은 일이면 뉴스에 나오겠냐는 결론이 났다.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아이의 필드 트립 당일이 되었다.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 가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오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필드 트립을 간 아이의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불안을 아이에게 전달하지 않는 일이고, 걱정으로 내 마음을 해치지 않는 일이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걱정이 삶의 질을 방해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두려움의 포로가 된 자는 삶의 아름다움을 누리기보다는 잠재적인 위험으로 빠져든다. 걱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기쁨을 방해하고, 긴장하게 하고, 방어적이 되게 한다.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유전적으로 불안을 탑재한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일의 97%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고, 3%는 일어나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만약 대비가 가능한 일이라면 준비를 잘하면 된다. 걱정을 떨쳐버리려고 하기보다는 이 또한 인정을 하면 된다. 내가 걱정하고 있구나...... 이 마음을 나의 아들도 꼭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표지그림 : 라울 뒤피, 'Window opening on Nice' (1928) | SHIMANE ART MUSEUM

상자안 글: 리처드 칼슨 <행복에 목숨 걸지 말라>, 스물일곱번째 사소함 '걱정'


*아이 얘기는 안 쓴다고 약속했는데 내가 주인공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날아가는 새를 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