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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02. 2023

날아가는 새를 치다

바스러진 관계의 느낌표

   

인간관계가 힘들어진 이유 중 하나는 요즘 사람들이 예전보다 ‘나’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글을 어디에선가 읽었다.  '나의 가치', '나의 욕구', '존재의 의미' 등등을 생각하다 보면 '나'라는 사람은 점점 더 세분화된다. 잘게 잘라진 단면들은 모양을 맞추기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나는 왜 이럴까?’라는 질문 자체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저런’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시기는 학창 시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에 따라 관계를 맺는 사람의 폭이 더 확장되기도 하고, 때로는 축소되기도 한다.      


한때는 나 스스로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직장을 다닐 때는 주말에 쉬지 않고 누군가와 약속을 잡았다. 직장 상사는 주말에는 좀 쉬라며 힘들지도 않냐고 되물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 의무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50,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해서 몸을 고생시켜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50, 반반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좋았던 거 같다.      


나는 사람을 새로 사귈 때, 일본의 후쿠부쿠로福袋(복주머니-Lucky Bag)가 떠오른다. 일본에서는 새해가 되면 백화점이나 잡화점에서 쇼핑백 하나에 다양한 물건을 보이지 않게 담아놓고 판매하는 이벤트를 한다.     


 5천엔, 7천엔, 1만 엔 표찰이 붙은 쇼핑백을 하나 골라 들면 내 안에서 호기심과 기대감이 경쟁을 벌인다. 별거 없을 거야! 재미 삼아!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내가 낸 금액보다 더 값어치가 있는 물건을 만나길 기대한다. 들어있는 물건이 모두 나에게 ‘꽝’ 일 때도 있다. (내가 사람을 도구나 물건으로 다룬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이건 어디까지나 은유적인 표현이다.)


상담을 받고 나서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나의 취약점이 무엇인지, 개선점이 무엇인지 파악을 하였기에, 상담 후의 새로운 사람과는 관계를 더 잘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역시나 조금 차이가 있었다.     


캐나다에 온 후로 새로 만나게 된 후쿠부쿠로는 모두 10명 정도이다. 그중 절반은 심리상담을 받기 전, 나머지 반은 심리 상담을 받은 후에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반 이상의 후쿠부쿠로에서는 느낌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관심사가 같고 대화 수준의 층위가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성사된 만남들이었다. 몇 번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각자 보유하고 있는 비밀의 아이템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은 만난 당일에 호기심의 물음표가 확신의 느낌표가 되지 못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선명했던 느낌표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의혹의 물음표로 퇴색하다 흔적 없이 증발해 버린 적도 있다. 이렇게 서로의 후쿠부쿠로가 ‘꽝’ 임을 반영하는 태도들로 인연은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학교나 직장에서는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기는커녕 송곳으로 바뀌어도 꾹 참고 만나야 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를 참고 만나야 할 이유가 없다. 최근의 시간들은 자발적 고립에 가깝다. 그렇다고 히키코모리는 아니다. 적절하게 필요한 만남을 갖고, 삶의 의욕도 충만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      


혼자 있다고 사무치는 외로움에 치를 떨지는 않는다. 심심하지도 않다. 이전에는 외로운 시간의 공간에 술을 채웠지만 지금은 그 외에 다른 것들이 제법 뿌리를 내렸다. 많은 철학자들이 혼자가 되어 고독을 즐기는 정신의 고양에 대한 주장을 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혼자 있음을 통해 진정 자신을 알게 된다'라고 했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인간관계를 이어가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는 음악의 박자와 같다. 피아노를 칠 때 오른손과 왼손의 스킬이 아무리 훌륭해도 둘이 맞지 않으면 음악이 어그러진다. 어떤 사람과의 교류는 바흐의 인벤션처럼 정박으로 흘러간다. 갈등 상황이라면 가끔 나오는 긴 트릴이다. 특히 왼손. 어떤 사람은 나에게 5:6 폴리리듬이어서 좀처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지가 않는다. 오른손이 왼손에 회유적이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 5:6 폴리리듬이 익숙하지 않다.)      


기대에 어긋난 새로운 만남들 속에 생겨난 마음의 얕은 생채기는 불가피한 접촉 사고 정도로 생각하려 한다.      


캐나다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인 슈퍼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블루베리 밭이 펼쳐진 작은 시골길을 달리는데 한 무리의 참새 때가 왼쪽 길가에서 날아올랐다. 어수선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새들 중 한 마리가 달리는 내 차 앞으로 날아들었다.      


가볍게 통! 하는 소리가 났고 백미러를 통해 내 눈에 들어온 장면은 믿기 힘들었다. 백미러에는 내 차 뒤로 멀어지는 주먹 만한 갈색 뭉치가 굴러가는 것이 비쳤다. 오랜 기간 운전을 하는 동안 내 차 앞을 지나간 새들은 많았다. 날렵하고 유려한 날갯짓으로 치일 듯 치이지 않게 빠져나간 새들처럼, 나도 그 참새를 믿었다.      


친구에게 날아가는 새를 차로 쳤다고 말하니 친구가 말한다.


“새가 잘못했네.”      


과연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건 아니었을까.

새는 새의 방식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갔을 뿐이고, 나는 규정속도로 나의 길을 달렸을 뿐이다. 우리는 박자가 안 맞았다. 새는 안타깝고 나는 안쓰럽다.  나는 후쿠부쿠로에서 기대감을 상실하고 날아가는 새를 친 적이 있다. 그래도 앞으로의 새로운 후쿠부쿠로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표지그림 : 모리츠 에셔, 낮과 밤 Day and Night, M.C. Escher,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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