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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17. 2023

몸과 정신에 지는 빚, 불면

카페인, 잠 그리고 술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나의 멱살을 잡아챈 것은 요의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딱 세 걸음 거리의 화장실 문을 열고 불을 켰다. 새하얀 형광등도 아닌데 눈앞이 은하수처럼 눈부신 별들로 가득 찼다. 잠시 벽을 잡고 서서 별들이 우수수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새벽 2:39. 느낌적인 느낌으로 이 밤에 다시 잠과 손을 잡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잠은 창문을 열고 야반도주를 해 버렸다. 이렇게 된 거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카톡이나 해보자 하고 거실로 몸을 옮겼다. 


 여기저기 툭툭 카톡을 던지다가, 한 친구가 쏟아내는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었다. 핸드폰 속 작은 창에 글자로 뿌려지는 MSG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고개를 들어 부엌문에 달린 작은 창을 쳐다보니 까만 창이 하늘색이 되어있었다. 



 오늘의 이 장면. 한창 술 마실 때 자주 연출되던 각성 장면이다. 술은 진정제처럼 잠이 오게 하지만 각성 효과가 있어서 숙면을 취하지 못하게 한다. 밤을 새운 뒤 새벽의 뇌 기능은 술에 만취한 상태와 흡사하다고 한다. 술을 마신 것처럼 몽롱하고 초점이 안 맞고 똑바로 생각을 하기 힘들다. 


  술을 마시던 시절에는 밤이 두려웠다. 잠을 자야겠다는 강박에 더해, 잠이 안 올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술을 안 마신 날, '나는 오늘도 잠이 안 올 거야'라는 주문은 어긋남이 없었다. 



 대체로 매일 술을 마셨지만 감기에 걸리거나 항생제를 먹어야 할 때면 열흘이나 2주 정도 술을 안 마시기도 했다. 그나마 감기약은 몸이 무거워지면서 잠이 들기나 했지 항생제는 잠도 안 온다. 


 침대에 머리를 대고 누워서 뒤척거리기를 한 시간 정도 한다. 왜 잠이 안 올까 생각을 하다가 '아, 눈을 안 감았네.' 하며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운이 좋으면 다시 한 시간 정도 뒤척이다가 잠이 든다. 운이 안 좋으면 포기하는 게 빠르다. 일어나서 영화 요약 유튜브를 보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잠을 자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복지관에서 이민자들을 위해 한국어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영화 황해에서 봄 직한, 머리를 파랗게 깎은 깡마르고 다부진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는 단호했다. 술을 마셔야만 잠을 잘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소주 한 병을 안 마시면 잠을 못 잔다고, 손을 휘저으며 말을 하던 모습이 잊히지가 않는다. 



 나는 술을 수면제 대용으로 썼던 걸까? 아니면 잠이 안 올 거라는 불안감을 없애는 진정제로 쓴 것일까? 



 어디에서도 듣기 힘든 조금 무서운 얘기를 해볼까? 술을 연속으로 많이 마시다가 지쳐서 잠깐 멈추는 날이 있다. 그런 날 밤에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각양각색의 눈들과 마주치게 된다. 노랗고 찢어진 눈, 빨간 동그란 눈, 서슬 퍼런 번쩍이는 눈, 멀리서 부터 빙글빙글 회전을 하며 나에게 날아오는 눈...... 모두 귀신의 눈들이다. 


  무서운 눈과 마주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서 나의 눈을 뜨고 천정을 바라본다. 마주친 눈의 잔상이 멀어져 갈 때쯤 다시 눈을 감는다. 이번엔 보라색 눈이다. 다시 눈을 떠서 보라색을 뿌리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지쳐서 잠이 든다. 참으로 가련한 잠이다.



 그렇게 나는 온전한 잠을 못 자며 다량의 잠을 빚지게 되었다. 술을 끊고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던 잠을 갚아 나갔다. 낮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8시가 넘으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을 만큼 잠이 쏟아졌다. 잠이 오는 대로 꼬박꼬박 갚았다. 그렇게 수면의 빚을 거의 다 덜어내었을 무렵이었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하얀 물감을 잔뜩 섞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의 언덕이 보였다. 구체적으로 무엇 무엇이 보였다기보다는 전체적인 색의 인상이 그러했다. 흡사 인상파 클로드 모네의 그림 같은 것이었다. 더 이상 무서운 눈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고 나는 모네의 그림 속에서 포근히 잠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한 단잠의 시간을 보내던 나였는데. 왜 오늘 갑자기 과거의 유체이탈 좀비 체험을 다시 하게 되었을까. 최근에 손크기의 화면을 보는 시간이 급증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브런치를 하면서 핸드폰에 눈을 붙이는 시간이 확실히 늘었다. 


 그리고 커피. 술을 끊으면서 커피도 끊었다. 술 대신 마시는 무알콜 맥주가 있다면 커피는 디카페인이 있다. 처음에는 아침에 한 잔 디카페인 커피를 마셨다. 어떤 사람은 커피를 각성 효과 때문에 마시는 건데 디카페인을 뭐 하러 마시냐고 한다. 나는 그 잿가루 같은 맛이 좋아서 마신다. 얼음이 가득 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오는 시원 씁쓸한 쾌감이 있다. 


 처음에는 오전에 한 잔만 마시던 디카페인 커피가, 오전에 두 잔, 점심 먹고 한 잔, 오후 간식 먹을 때 한 잔, 어떤 날은 저녁에도 한 잔...... 이런 식으로 늘어갔다. 알코올 중독의 프로세스와 다를 바가 없음에 몸서리 쳐진다. 나의 뇌가 중독의 사슬에 단단히 옭매여 있구나 하는 생각에 떨떠름하다.


 디카페인 커피라고 해도 한 잔에 10mg의 카페인이 들었다고 한다. 이제 디카페인 커피도 사다 놓은 것까지만 마시고 끊던가 해야겠다. 이런 사고방식조차도 어쩜 이렇게 판박이일까. 술 사다 놓은 거 까지 마시고 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여간.....


 핸드폰, 커피와 더불어 글을 쓴답시고 더블로 늘어난 생각들.  -아! 라임- 


 이런저런 원인으로 어제 잠을 설친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특히, 어젯밤에는 갑자기 더워진 탓에 몸이 많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지금 야반도주했던 잠이 돌아와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새벽에 진 빚을 갚으러 가야겠다. 





잠을 줄이는 건
몸과 정신에 빚을 지는 것으로
언젠가는 꼭 갚아야 한다.*








표지그림 : Irises in Monet.s Garden, 1900,  Musée d'Orsay, Paris, France



*이유진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말 (아래 기사에서)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3033183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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