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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13. 2023

오늘, 죽음을 준비

내가 떠난 자리에 남겨질 것들

 브리즈번 한 달 살기를 갔을 때의 일이다. Queensland Museum에서 하는 Perception Deception (지각 기만)이라는 과학 체험을 하러 갔다. 12시 입장 티켓인데 조금 일찍 도착했다. 나와 아이는 뮤지엄 내부의 카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려고 줄을 섰다.


 바로 앞에 손녀를 유모차에 태우고 오신 호주 할머니가 계셨다. 자꾸 내 얼굴을 힐끔힐끔 보신다. 그러다가 결심을 한 표정으로 나에게 중국에서 왔냐고 물으신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할머니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반갑다고 하신다.


- 내 아들이 한국 사람이랑 결혼했어. 그녀 이름이 세연이야. 너는 이름이 뭐니?


나의 이름을 말하자 할머니는 내 이름을 한 번, 며느리 이름을 한 번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 But, She died.


 카페에 줄을 서서 며느리의 사망 소식을 들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나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엉뚱하게 그들이 지금 한국에 사냐고 묻게 되었다.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재차 "Oh, She died. So sad."라고 말씀하셨고 그제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 I'm...... I'm so sorry.


 뻘쭘해진 내가 말했다. 할머니는 인자한 웃음을 내어주시며 괜찮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한국에 가 본 적이 있으신데 아들내외가 결혼할 때 한 번, 그리고 4년 후 며느리가 하늘나라로 갔을 때 한 번이라고 하셨다. 세연 씨는 결혼 4년 만에 어린 두 아이와 남편을 세상에 남겨두고 먼 곳으로 가버렸다. 남겨질 가족이 얼마나 눈에 밟혔을까.


 할머니는 그 말씀 뒤로 나와 잡다한 대화를 나누셨다. 주문 차례가 오자 만나서 반가웠다고, 여행 잘하라는 말씀을 하신 후 간식거리를 들고 유모차를 밀며 총총 사라지셨다.


 나를 보고 당신의 며느리를 떠올렸던 할머니가 갑자기 생각이 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에 있는 친구와 카톡을 하는데 지인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살 많은 언니였는데 수 해 전부터 암투병을 한 사람이다. 암이 장기 곳곳에 전이가 되어 속수무책으로 요양원에 머문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결국 그녀는 허망하게 두 아이와 남편을 두고 먼 곳으로 가버렸다.


 언제부턴가 주변에 암에 걸린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0대 초반, 임신 중에 유방암을 발견한 내 친구는 다행히 출산을 하고 긴급으로 암수술을 받았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독한 항암치료도 견뎌낸 친구는 다시 살아났다는 감사함에 그 좋아하던 술, 담배도 다 끊고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고 있다.


 며칠 전, 또 한 명의 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처럼 아이와 둘이 캐나다에 온 엄마이다.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에 방문했고 건강검진에서 '암'을 발견했다고 한다. 일사천리로 수술실까지 들어갔는데 엄청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이 시작되었는데 본인도 몰랐던 마취약 알레르기가 있었던 것이다. 혈압이 곤두박질쳐서 암은 제거도 못하고 간신히 소생만 시켰다고 한다.


 한국에는 잠시 놀러 간 것이니 여기의 살림살이는 그대로이다. 암 수술은 몸이 회복을 해야 다시 시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수술을 받아도 항암치료가 기다리고 있다.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얼마나 걸릴지 기약이 없다. 아이의 학교며 이곳의 모든 짐, 차 등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이다.


 유학맘인 그녀의 이야기에 심히 감정이입이 되었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나도 이런 상황을 생각해 봤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에서 암이 발견되고 수술을 받아야 하면, 캐나다 살림이며 아이 학교는 어떻게 하지?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






 삶은 변수 투성이다. '암'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사람도 없고 '중독'이 되겠다는 목적을 갖고 술을 마시는 사람도 없다. 내가 오늘 길에서 죽을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어느 봄날, 늘 다니던 산책 코스에서 죽음을 목도했다. 오토바이를 타던 사람의 교통사고 사망 현장이었다.


 오토바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산산이 부서졌다. 근처 바닥에 무력하게 누워있는 사람과 그에게 CPR을 실시하는 구급대원을 보았다. 필사적인 구급대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이커의 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날 오토바이를 몰고 집을 나서며 자신이 집에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을까?


 단어가 가진 개념으로서의 의미를 보면 '죽다'의 반대는 '살다'이다. 하지만 실제 '죽음'은 삶의 끝 또는 태어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내 옆에 숨어 있다.  


 흔히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죽음은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의 끝이 아니라 길 위에서 나란히 나와 걷고 있는 것이다. 내가 운전하는 차에도, 내가 타는 비행기에도, 내가 잠을 자는 이 집에도, 내 삶에 교집합처럼 존재하는 것이 죽음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은 느릿한 나룻배처럼 멀리에서 다가오기도 하지만 '변검'처럼 찰나의 순간 내 앞에 얼굴을 드러낼 수도 있다.


 방송인 신애라 씨는 미니멀리스트로 유명하다. 그녀가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애라 씨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러 간 집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버려져야 했다고 한다.


 그것을 본 신애라 씨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자기의 죽음 뒤로 처리해야 할 많은 일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처분하고 지금의 집처럼 '사람만' 사는 집이 되었다.


 나는 옷장과 찬장을 열어 둘러보았다. 내가 갑자기 이곳을 떠나면 내 뒤로 남겨질  이 무수히 많은 것들. 누군가가 고생하며 치워야 하는 물건들이다.


 나의 물적 흔적들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워질 것이지만 영적 흔적들은 남겨질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죽으면 그 사람의 육신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소멸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부모님의 딸로, 남편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친구로. 사람들은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마침표가 아닌 사는 것의 이어 짐이다.




 독일의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한 말을 되새겨 본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못난 인생을 두려워하라.

 

  

 술을 끊기 직전에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이렇게 술을 먹다간 갑자기 죽어버리겠지. 그럼 내 집에 온 사람들이 발견하게 될 것은 시큼한 냄새가 나는 빈 술병들이겠지. 나는 술만 마시다가 죽은 무책임하고 방종한 인간으로 남겠지. 고결한 죽음 같은 것은 고사하고 수치는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제 여름방학이 한 달가량 남았다. 남은 방학 동안 내 뒤에 남겨진 것을 치울 누군가의 수고를 덜어줘야겠다.


 물건뿐만 아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데 소멸하지 않고 지속되는 나란 '존재'를 어떻게 남길 것인지 삶의 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잘 죽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잘 살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표지그림 :

<정물; 바니타스(Vanitas)>는 16-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유행한 예술장르이다. 바니타스는 ‘덧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메멘토 모리(Memanto mori),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 또는 “너 또한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와 함께 유사하게 사용됐다.



출처 : 전북대학교 신문방송사(https://www.jbpresscen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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