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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Nov 23. 2022

우아한 보통날

갱년기 여성 해부학


뒷뜰 수돗가에 쭈구려 앉아 담배 한까치를 물었다.

담배를 끊은지 20년은 된거 같은데 도저히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온몸의 무기력함이 너무 심했다.

머리끝부터 시작해서 온몸 마디마디를 거쳐 손끝과 발끝까지 정말이지 어느것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반응했다. 아니다. 의지 자체도 제 할일을 잊어버렸다.


이렇게까지 무기력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요 몇년간 지속적이진 않지만 간헐적으로 우울증이 왔다 싶긴 했다.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지속되는 건 아니고 생활 중간중간 굵고 짧게, 때론 그 증상이 조금은 오래 또는 가늘게 나타나는 증상은 당장의 치료를 요할만큼의 중증은 아니라 판단했기에 적당히 파도를 타고 넘어가듯 가보자 했었다.

올 가을과 함께 무기력증이 심하게 왔다.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흐리멍텅한 기분이었다. 철저하진 않더라도 하나하나 세우고 실행했던 하루의 일과들, 계획들이 모두 머릿속에서 먼지가 되어갔다.


술을 마셔봤다.

매일 저녁, 식사와 함께 반주삼아 마시던 맥주 한캔을 두캔, 세캔으로 늘려보기도 하고 주종을 바꿔 소주나 와인으로 대체해보기도 했다.

낯선 타지생활에서 오는 비자발적 묵언수행이 길어진 탓인가 싶어 습자지보다도 얇은 인맥을 동원해 지인을 만나 수다도 떨어봤다.

가는 실타래처럼 겨우 이어오고 있는 옛친구에게 카톡이나 전화를 날려보기도 했다.


과음한 다음 날은 일단 몸이 버텨내질 못해 우울증과 죄책감까지 더해 증상이 더 심해졌고

지인을 만나고 돌아나오는 순간엔 무의미한 말을 배설해버렸다는 헛헛함과 함께 밥먹고 차마신 돈까지 아까워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통화한 옛친구에겐 안부 인사로 시간의 반을 빼앗겼고 이후 내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또 남은 시간의 반을 썼으며 짧은 위로와 공허한 안부로 나머지 반을 채웠다. 역시나 통화 후 마음은 더 빈 깡통이 되었다.

산송장처럼 살순 없기에 어떻게든 힘을 내봐야 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아침마다 출근하기 전 짬을 내어 산책을 했다.

몸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며 강하게 저항했지만 그럼에도 이대로 죽을순 없으니 살기 위해서 기계적으로라도 걸었다. 산책은 그래도 공허함을 채워주는 듯했다.

그러나 짧은 산책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출근후 가게의 오후가 되면서부터 다시 무기력증이 밀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람이 모진 제주의 가을은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황망하기 그지 없었고 내 마음에 부는 황망함은 그 곱절이 되어 사정없이 흔들렸다.


생각다 결국 찾은게 이 담배였다. 담배 한까치가 위로를 줄수 있진 않을까?

담배 한까치를 입에 물고 불어대는 바람을 손으로 막으며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빠알간 불빛이 옮겨붙으며 필터타는 냄새와 함께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모금 길게 빨고 연기를 내뿜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 있던 회한이 한 가닥 쑤욱 올라와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손끝, 발끝까지 전해지는 노곤함에 잠시 등을 기댔다.

이어진 두번째 모금부턴 강한 담배냄새가 역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봐도 연기는 나를 향해 피어올랐고 몸에 배는 그 냄새가 남을까 걱정되고 싫었다. 남은 부분을 다 태우지 못하고 바닥에 눌러 껐다. 매캐한 연기와 후각에 느껴지는 타던 재 냄새, 그리고 손가락에 밴 진한 담뱃내가 역겨웠다. 아주 찰나의 해방감만을 안기고 그렇게 연기 사라지듯 잠시의 황홀감은 사라져버렸다. 이후 현실은 더욱 가혹하게 내게 남겨진 듯했고 짧은 황홀감 뒤에 오는 헛헛함은 더욱 무력하게 다가왔다.


몸과 마음은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고 싶었지만 그래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돌봐야할 아이가 있으니 어떻게든 힘을 내보려 애를 썼다.

가게를 지킨다는 핑게로 전자북만 본지 어언 일년이 넘어 참으로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렀다. 이 허망함과 무기력함을 달래줄 도구가 혹시 종이책이 되어주진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붙들었다.

도서관에 들어선 열람실 책장앞에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눈은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의 제목을 읽어내리고 있었으나 그 제목이 뜻하는 의미를 깨닫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두어시간 동안 주섬주섬 여덟권의 책을 담아 나왔다.


일주일에 한번 쉬는 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대낮부터 방에 틀어박혔다. 환한 햇볕을 커튼으로 모두 차단하고 스팀 매트를 틀고 침대 이불속으로 들어가 쌓아둔 책의 첫장을 펼쳤다.

실로 오랜만에 오롯이 집중이란 걸 했다. 그리고 조금씩 치유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물론, 며칠 못가 또 바닥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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