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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Jun 28. 2016

그 어떤 절망도 희망도 없이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건네준 위로

하루키의 책은 언제나 그랬다.

한폭의 수채화를 읽는 느낌.

잔잔한 호수 위 조용히 퍼지는 파도의 일렁임.

간결함 속에서 빛나는 특유의 시니컬함과 야단스럽지 않은 위로.



강렬했던 그와의 조우


그의 책 '상실의 시대'를 만난 건 대학 1학년때였다.

집 근처 작은 서점에 들렀을 때, 매대에 올려져 있는 책을 봤고 첫 몇장을 넘겼다.

두어장쯤 읽었을까? 그대로 내 맘에 쏙 들었다.

사람으로 치면 첫눈에 반했다고 할까?

그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와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책은 술술 잘 읽혔다. 그렇게 다 읽은 이후에도 오래도록 잔상이 남았다.

가슴 한켠에 싸한 바람이 부는것 같았다. 그냥 쓸.쓸.했.다.

지금 그 책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그 느낌, 내 마음 어느 한공간에 구멍이 뚫리고 그 뚫린 공간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들었던 기억만이 남아있을뿐.

이후로 읽은 책들은 '하루키의 문체'와 '하루키의 문체가 아닌것'으로 나뉘게 되었다.




묘하게 끌리는 그만의 색깔


그의 글은 뭐랄까?

딱히 뭐라고 말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관계로 치자면 이성을 끄는 호르몬인 페르몬 같은 것?

사실 스토리로 보자면 그의 책의 대부분의 내용들에 대해선 이해하기가 힘들다.

난해한 건 둘째치고 현실과 상상의 구분이 모호하며 시대가 혼재되고 남녀의 구분도 불명확하다.

다른 작가들의 소설들에서 보여지는 선과 악의 구분, 남과 녀의 차이, 세대와 환경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어딘가 공상 속으로 빠지고 심리는 물속을 부유하듯 짙은 안개처럼 흐릿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이거다 싶게 명확하지 않고 내용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차원 세계속 이야기같다. 그 안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들 또한 자칫 길을 헤매기 일쑤고 주인공들과 함께 이공간과 저공간,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넘나드는 부력의 체험을 하는 느낌이다.

다 읽고 나도 도통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쉽게 잡히질 않는다.

그렇게 한바탕 한낮의 꿈을 꾸고 난 느낌이랄까?


그.럼.에.도.불.구.하.고.

그의 글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그냥 위로가 된다. 딱히 뭐라 말할수 없는데 그가 독자들을 위로하겠다고 작정하고 덤비는 것도 아닌데, 스토리에 친절함도 없는데, 어찌보면 작가 멋대로인듯도 한데, 그런데도 읽고나면 위로가 된다. 파올로 코헬로 같은 사람의 책은 사실 여러권 읽고 나면 '아 이 사람이 작정하고 위로라는 걸 하겠다는 거구나.'라는 느낌이 온다. 그런데 하루키는 그냥 작가는 의도하지 않고 자기 쓰고 싶은 데로 썼는데 그 안에서 위로가 된다. 참으로 희한한 경험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그의 최근 책 '직업로서의 소설가'를 보고나면 조금은 그 의문이 풀린다.

그의 소설과는 다르게 그의 수필집들은 독자들에게 참으로 관대하고 친절하다.

재즈에 대한 글도 그렇고 여행에 대한 글도, 이번 글쓰기에 대한 글도 담담하면서도 그 안에 배려심이 느껴진다.

사실 어느 소설가가 자기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고 또 배려심있게...

 

그는 독자들이 궁금해할 내용들을 모아 총 12개의 카테고리로 조근조근 대화하듯 글을 썼다.

소설가는 어떤 인종인가부터 등단의 계기, 문학상에 대한 의견, 문체와 소재에 대해, 또한 소설가란 직업이 가지는 신체적 특성에 관해, 해외진출에 대한 경험과 의견까지...


개인적으로는 작가들에 대해 정말 궁금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책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선입견.

고뇌하는 인물로 낮밤이 바뀌어 있고 술과 담배에 쩔어 있으며 냉소적이고 한번 삘 받으면 미친듯이 써내려갔다가 안써지는 날은 방황하는 인물.

나 역시도 '작가'란 그런 건줄 알았다.

내가 '작가'가 되지 못하는 건 '그렇게' 하지 못해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엔 난 아이도 봐야 하고 가정도 책임져야 하는 주부라는 길에 들어서버렸기에 서로 갈길이 너무 달라져버렸다고.

'작가'란 고통스러움 속에서 창작렬이 불타오르고 그러기에 지금의 이 평탄하고 고요한 내 길에서는 최소한 이혼이라도 하고 경제적 나락으로 더 곤두박질치고 밤거리를 더 헤매봐야 할 거라고. 그게 두려우면 '작가'의 꿈은 꾸지도 말고 지금처럼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는 독자로서만 만족해야 하리라고. 그래서 그 길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길이라고.

뭐 지금와 생각해보면 변명에 지나지 않지만 어쩌랴. 어려서부터 고착되온 이미지며 선입견에서 나 역시도 자유롭지 못했을 뿐. 게다가 내 주변엔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을 뿐.



오리지낼리티를 가질 것


그런 나에게 이번 책 역시 많은 위로가 되었다.

글을 쓰는 일이란 내가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고뇌하며 번민해야 하는 일도 아니라는 말이, 또한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운동을 통한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이란 얘기가 '그럼 나도 해 볼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준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처럼 작가란 뭐 꼭 전문전인 글쓰기 강습을 받아야 한다기보단, 자신만의 고유한 '오리지낼리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또 한번 내게 위로가 된다.

그 '오리지낼리티'를 위해 하루키가 공개한 비법이라면 비법이랄까?

초기 자신의 처녀작을 쓸 때 다 쓴 원고를 읽어봤는데 맘에 들지 않더란다. 재미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재밌지도 않더라는.  무언가 부족한 듯해서 그 스토리를 영어로 다시 써 보고 그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해봤단다. 그랬더니 읽기도 더 쉬워지고 재밌어져진듯해서 이후부터는 그 문체를 쓰게 되었다고.


아하! 알았다. 그의 글이 주는 묘한 색채. 그것은 그 '문체'였다.

기존에는 없던, 이후에도 흔히 볼 수 없었던 그의 '문체'. 하루키의 글은 그 '문체'가 주는 맛에 있었다.

물론 그가 선택하는 어휘들에서도 나타나는 거지만 그의 글은 뭐랄까?

동양과 서양의 중간쯤, 구세대와 신세대의 중간쯤 그 어디쯤에 있는 다른 세계의 느낌이 난다.

그건 그의 글이 영어와 일본어의 문체 그 어디쯤에서 필터링 되었고 단어들 또한 외래어를 그대로 쓰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겠다. 그것이 그만의 독특한 문체와 느낌을 만들어낸거고.

물론 이건 기술상의 문제라 할수 있겠고, 진정한 그만의 느낌은 그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묘사와 꿈꾸는 듯한 경계없는 스토리의 거침없는 표현때문이겠지.




그 어떤 절망도 희망도 없이


 그가 글 쓰는 직업인으로서 가장 강조한 건 '체력'이었다.

누군가가 '글은 손으로 쓰는 게 아닌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것 같은데 역시 같은 맥락이겠지. 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작가도 꾸준함이 없이는 발전도 작품도 없다는 이야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이가 들어도 써낼 수 있는 '육체적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곧 자기관리에서 온다는 것.

무엇보다 평정심을 갖고 매일 '그 어떤 절망도 희망도 없이' 20매씩의 원고를 쓰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작가를 원하는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나 역시도 할 수 있다는 것'.


'그 어떤 절망도 희망도 없이' 매일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는 작업을 지금 시작할 것.

그 어떤 글쓰기 책보다도 내게 조용하지만 강력한 위로와 힘을 준다. 

단단한 팔 근육만큼이나 간결하고 심플한 얼굴로 하루키가 책표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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