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_12
참 좋은 계절이다. 나뭇잎은 연둣빛으로 물들고 따뜻한 바람에 한 낮에는 짧은 소매에도 팔뚝을 스치는 햇빛이 기분좋게 느껴지는 계절, 5월이었다.
딸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의 체육대회가 열리는 주말 아침, 행사가 열리는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모여 든 원생들과 아이들의 부모들로 넓은 운동장이 제법 들어찼다. 그녀도 아이를 데리고 참석했다. 엄마만 참석하는 것이 아이에게 아빠의 부재로 인한 상처가 될까 보아 근처에 사는 언니와 조카들, 친정엄마까지 동원해 태우고 왔다. 언니는 어린 쌍둥이 조카들을 단속하느라 바쁘고 친정엄마는 엄마대로 그늘진 스탠드에서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을 바라본다며 앉아 계셨다.
시작된 유치원 행사는 아이들 행사 반, 부모들 행사 반이었다. 매번 종목마다 엄마, 아빠의 참여를 독려했고 요즘 아빠들답게 아빠들도 적극적으로 행사에 임했다. 평소 운동신경과는 담 쌓은 그녀였지만 그녀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악착같이 경기에 임했다. 엄마가 나오라고 하면 달려갔고, 엄마와 아빠 중 한명이 참석해야 한다면 또 달려갔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열심히 참석하는 엄마를 아이가 좀더 자랑스러워 해주길 바랬으나 딸아이는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자격지심이었겠다. 양쪽 부모가 다 참석할 수 없는 아이가 그녀의 아이만은 분명 아니었을텐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꾸만 멋적게 서 있는 그녀의 딸아이가 두 발이 있음에도 한쪽 발만 지탱하고 서 있는 절름발이로 보였다. 아이의 어색함이 그녀를 닮은 부족한 운동신경의 대물림 때문이 아니라, 아빠의 부재로 인한 자신없음으로 보였다. 아무리 그녀가 애를 써도 채워지지 않는 것, 그것은 아빠의 자리인 것만 같았다.
그 화창한 봄날, 먼지가 폴폴 날리던 운동장의 그녀와 그녀의 딸을 그녀는 지금도 선연히 기억한다. 운동장 한 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하며 어색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을. 그리고 그때 그녀가 가졌던 간절함도. 친아빠가 아닌 새아빠라도, 젊은 아빠가 아닌 할아버지같은 아빠라도 아이에겐 엄마, 아빠로 이루어진 가족이 필요하다는 걸 그녀는 뼛속깊이 느꼈다.
아이가 다시 온지 6개월이 지났다. 지난 만남 이후로 아빠와의 두번째 만남이 있는 날이다.
연휴를 맞아 함께 울산 할머니 집에 데리고 다녀온다 했다. 안 간다는 아이를 달래서 그녀는 두 밤만 자고 오라며 아이를 아빠 차에 태워 보냈다. 모처럼만의 휴가를 맞아 친구와 함께 서해안으로 여행을 다녀온 밤, 적적한 방에서 그녀는 내일이면 아이가 도착한다는 설레임에 잠을 설쳤다. 벌써부터 아이가 그리웠다.
아이가 도착하기로 한 날, 이미 울산에서 올라왔을 아이에게서 연락이 없어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는 울산에서 올라와 일산에 있는 제 아빠 집에 있다 했다. 순간 그녀는 귀를 의심했다. 일산이면, 얼마 전 울산에서 올라온 그가 그 여자 J와 살고 있다는 곳이었다. 그 곳에 그녀의 딸을 데리고 간 거였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아빠에게 보낸 거지, 그 여자에게 보낸 게 아니었다. 그 여자가 왜 그녀의 딸을 보고 싶어하며 왜 그는 그녀의 딸을 그녀에게 데려다 줘야 하는 건지 그녀로서는 어떤 이유로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따져묻는 그녀에게 그는 너무도 당당했다.
"내가 사는 집 내 딸한테 보여주는 게 뭐가 어때서? 그 여자가 남이냐? 작년에 다 키웠던 사람이야. 너가 뭐라든 앞으로도 나는 내 딸 여기 데리고 와서 재우고 보낼꺼야. 왜 그게 어때서?"
"정말 너란 인간 치가 떨린다. 만약 내가 다른 남자랑 살고 있었다해도 그렇게 쿨하게 말할 수 있을까? 다른 남자랑 살면서 애 데리고 와 같이 재우고 간다면 보내 주겠어? 그 여자가 뭔데? 새엄마야? 엄마가 여기 분명히 있는데 왜 내 딸을 그 여자한테 보여줘야 하는데?"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마. 너랑 나랑 입장이 같아? 너 애 버리고 나갔을 때 키워준 여자야. 너는 이 사람한테 뭐라 할 자격없어."
기가 막혔다. 다시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그 여자를 두둔하는 것도 참고 들어줄 수가 없었다.
"니가 애비냐? 애 혼돈스러운 건 생각 안해? 너가 해준게 뭐 있는데? 어쩜 그렇게 너 생각만 하냐?"
결국 전화상으로 둘 사이에는 격한 감정의 욕지거리까지 등장했다.
"너 잊었나본데, 친권자는 나야. 너처럼 똑똑한 여자가 그걸 왜 모르냐?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애는 내가 데려올 수 있어. 지금이라도 보내지 말까?"
감정이 격해질수록 손해인 쪽은 그녀였다. 그도 당장 아이를 데리고 있을 형편은 아니었다. 서로를 자극하는 소모전은 무의미했다. 서로는 감정을 추스리고 그는 약속한 장소로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 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한 그녀는 그의 차를 발견하고 아이를 데리러 다가갔다. 아이는 그의 차 안에서 울고 있었다. 내리지 않겠다고, 아빠 집에 다시 가겠다고 떼를 쓰며 숨 넘어갈 듯이 울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익숙치 않았다. 그녀의 아이는 평소에도 차분하고 왠만한 일에서는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 참을성 있고 조신한 아이였다. 울 일이 있어도 작은 소리로 흐느끼는 정도였지 이렇게 엉엉 울며 떼를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엄마 집이 아닌 아빠 집으로 가기 위함이라니, 오늘 겨우 몇 시간 있었던 그 집에 다시 가고 싶어 이런 광경이 연출됐다는 사실이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알았어. 보내줄께. 아빠 집에 다음에 꼭 보내줄거야. 그러니 오늘은 그만 엄마랑 가자. 내일 유치원도 가야하고 친구들도 만나야지. 엄마 너가 자꾸 그러면 슬퍼. 엄마 혼자 가면 좋겠어?"
"안 가. 안 가. 엄마 집에 안 가. 엉엉."
아이는 마치 제 엄마가 제 아빠랑 저를 떼어놓기 위해 등장한 마귀할멈이라도 되는 냥 기겁을 하며 그녀를 밀쳐냈다. 아이를 달래던 그녀도 벌겋게 얼굴이 상기되며 화를 냈다.
"정말 안 갈거야? 지금 다시 아빠 집에 가야겠어? 이러고 가면 엄마 다시는 못 볼 텐데? 그래도 괜찮아?"
그녀의 협박에도 아이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갑작스런 아이의 행동에 당황했다. 게다가 좀 전까지 아이 문제로 다투었던 그가 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더욱 모멸감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아이에게 그 여자의 존재가 컸던 걸까? 그 여자를 만나고 온 것이 이렇게나 엄마를 밀칠 정도인가? 그녀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모녀의 전투를 보고 있던 그가 한참 후에 결심한 듯 나섰다.
"알았어. 아빠 집으로 다시 가자."
아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는 신고 있던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차 밑에 놓아두고 얌전히 앉아 어서 출발하자는 눈으로 제 아빠를 쳐다봤다. 그는 결심한 듯 운전석에 앉아 그대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몹시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다. 그리고 그곳은 한적한 전철역 근처였다. 얼굴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여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꼼짝도 않고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차 시동은 켜져 부르릉 대고 있는데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방금 벌어진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그녀는 분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곳에 그렇게 혼자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에 대한 배신감이 그녀를 무너뜨렸다. 힘없이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고 어딘가를 향했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어두웠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그녀는 차 안에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동안 그녀는 정말 최선을 다 했다. 어떤 댓가를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아이가 그녀의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제 아빠가 그 여자랑 새로 이사하고 함께 산다는 소식에 앞으로 학교 보낼 일들을 생각하며 나중에라도 보내야 하나 혼자 생각은 해 봤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서러움에 끄윽끄윽 소리내어 울며 가까운 그녀 언니네 집으로 갔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들어 온 동생에게서 자초지정을 들은 그녀의 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쩌겠니? 그게 그 애 마음인 걸. 그 여우같은 것이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그렇게 참고 산 애도 참."
그녀 주위는 온통 난리가 났다. 울산 시어머니는 당신 아들이 억지로 데려갔는 줄 알고 엄마에게 보내라며 난리였고 생전 연락없던 큰형님까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식으로 애를 보내면 어떻하느냐 나무랐다. 친정엄마는 조금만 기다려보면 다시 올 거라며 그녀를 달랬다.
난리속의 하루가 흘러 밤이 되었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를 바꿔주겠다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는 너무 밝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만큼 편안했다. 그녀는 애써 슬픔을 억누르며 밝게 물었다.
"우리 딸, 거기 있으니까 좋아? 갈아입을 옷도 없을텐데 필요하면 보내 줄까?"
아이는 그래달라 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자기 짐을 다 보내달라 했다.
그래도 설마했던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무너졌다. 와르르 와르르 가슴 속 돌담이 무너져 내렸다. 전화를 끊고도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주르륵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가슴 속에서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싫었니? 엄마랑 사는 게? 그렇게 좋았니? 고모를 다시 보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