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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Apr 13. 2017

다시 호흡

'집'이 주는 위안에 대하여

한동안 글을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쓰지 못했다

'시간이 없었다'는 건 분명한 핑게.

물론, 지난 2주동안의 시간들은 또한 나이내믹한 시간들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어느새 2주가 지났다.

 남편과 나는 드디어 지하세계를 탈출했다.

상권을 보는 시선은 '유동인구보다는 소비인구'라는 커다란 명제를 가슴깊이 새기며 지난 한달간의 시간을 마감했다. 아울러,

급하게 마련했던 오피스텔을 한달만에 정리하고 예전 살던 동네로 다시 회귀했다.

우리의, 아니 나의 인생시계는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항상 그래왔듯 변함없이..

주변 사람들마저도 현기증이 느껴진다 할만큼.


 이사하는 첫날, 아이가 있는 언니네 집에서 새벽에 집을 나섰다. 맑은 봄바람이 온몸에 스며드는 월요일 아침에 지하세계가 아닌 지상에서의 느낌은 묘했다. 살아있는 듯하면서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살아내기'의 숙제가 유달리 더 진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달까? 아마도 내 주위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발걸음의 속도 속에서 나 역시도 유유자적 할 수 없는 '동질의 다급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아 내 차 뒷좌석에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짐들은 전날 주말 한차례 집근처 지인의 집으로 옮긴 후에도 여전히 터질듯이 꽉차 우리의 애를 태웠다. '많이 갖지 않으리라', '우리는 미니멀리즘의 선두주자'라는 따위의 자화자찬은 더이상 위로도, 해당사항도 되지 못했다. 집에서 해먹은 밥이라고는 이사한 당일 저녁 한번이 고작인 살림이었지만, 사실 그 와중에도 식탁을 겸할 테이블과 의자, 스탠드와 카펫을 이케아에서 사들고 와 조립했었고, 소소한 양념들과 그릇, 숟가락 젓가락까지 언니네서 싸들고 온적도 분명 있었다. 게다가 필리핀에서 배편으로 보낸 짐이 오피스텔로 도착했고 상자 가득 들어찬 무게만도 엄청났던 그 짐들은 다 부리지도 못해 책들은 고대로 상자채 보관돼 있었다. 겨울잠바 하나와 운동화 하나로 버텼다고는 해도 옷장과 신발장에는 필리핀에서 도착한 현지에서 팔지 못했던 옷과 신발이 들어 있었다.


차에 실리지 못해 몇번이나 내렸다 테트리스 게임하듯 차곡차곡 쌓는 과정을 반복한 이후 나는 짜증이 났다. 햇살은 너무도 포근하게 봄임을 알리며 내리쬐는데 우리가 그 길바닥에서 하는 일이라곤 자질구레한 이불과 엉성하게 싸놓은 짐들의 어질러짐이라니.. 필리핀에서 온지 두달만에 그나마 보다 안정된 곳으로 이동하는 장족의 발전을 했다 긍정의 아이콘을 실행해보려해도 지난 삼개월동안만 네번째 이사였다. 그것도 짐이라고 할수도 없이 점점 줄어드는 보잘것없는 최소한의 것들이었고. 삶이 참으로 구질구질하게 느껴지는 화사한 봄날, 난 서러움과 함께 밀려드는 짜증에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어쨌든 우리는 다시 이사를 했다. 차에 한가득 실린 짐들을 몇번에 걸쳐 내리고 엘리베이터로 옮기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부랴부랴 지난주 면접본 새 직장에 나갈 준비를 마쳤다. 우선 집안으로 가져다놓은 짐가방중에서 손에 잡히는 옷을 대충 입고, 다행히도 정장느낌의 겉옷이 있어 스카프와 함께 둘러매고, 그나마 또 다행히도 다른 짐속에 들어있던 화장품으로 대충 화장을 하고, 백을 찾아들고, 그나마도 손에 잡히는 가방안에 들어있던 몇개 안되는 정장구두를 골라신고 그렇게 새직장이 시작될 잠실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했다. 필리핀에서 나올때 과감하게 짐정리를 했었다. 들어갈때 비용보다 더한 국제이사비용을 생각하며 차라리 팔고 가는게 낫겠다 싶어 게라지세일을 했다. 누구라도 와서 사가겠지 했던 그 장터는 그날부터 열흘동안 필리핀 현지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를 선호하는 그네들에게 나는 내가 아는 영어를 총동원하며 신나게 쓰던 물건들을 헐값에 팔아넘겼다. 쓰던 수건과 운동화, 그릇, 전자제품, 골프채, 화장실 세제까지 다 팔려나갔다. 그중에 남은 것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정장옷과 신발, 백이었다. 사무직이 아니었던 가난한 꾸야와 아떼들에게 그 물건들은 봐야 그 쓰임새로 가치도 알수 없는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명품백이라고 소중하게 진열해놨지만 반의 반의 반값도 아닌 금액에도 그네들은 슬쩍 보고는 무심히 지나쳐갔더랬다. 그런데 팔지못해 차마 버리긴 너무 아까워 짐가방에 꾸역꾸역 가지고 오면서도 '언제 이것들을 다시 입고 신고 멜 날이 올까?'했던 나에게 딱 필요한 날이 오는 건지. 많지도 않은 그 물건들을 나는 실로 오랜만에 면접을 보기위해 입고 신고 들고 나갔드랬다. 그마저 없었다면 또다른 시작을 꿈꾸지도 못했을지도.. 신이 있다면 이래서 '딱 필요한 만큼만 남겨주시는구나'라고 감탄했을 거다.


 이삿짐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남편과 나는 번갈아가며 집안정리를 했고 각자의 일을 바로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했던 냉장고와 세탁기를 중고로 들여놓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일상이 영위된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이사한 둘째날, 어수선한 와중에 급하게 마련한 된장찌개와 김장김치 볶음, 김과 설익은 냄비밥을 앞에 두고 남편과 나는 마주앉았다.

"아직 가스가 없어서 인덕션 하나에 의지하다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밥은 설익고 찌개도 급조한거. 반찬도 너무 없네."

겸연쩍어 하는 나에게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충분해. 이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사해. "

우리는 하는 맛있게 두 그릇을 비웠다.

'사는게 별건가? 어디든 살아지는 걸.' 그렇게 생각하며 어디든 우리집이 될수 있고 어디든 갈수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였다. 그러나 집이란 참 간단치 않단걸 느낀다. 집은 살아감의 '구심점'이고 낯선 길위에서의 마음의 위안이며 안정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매개체라는 걸 우리는 깊이깊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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