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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Feb 28. 2018

중년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모두 중년은 처음이잖아요.

 가을도 아닌데 스산하게 마음이 아리다.

봄을 맞던 그 부드러운 설레임은 지나간지 이미 오래다.

사는건 왜이리도 팍팍하게만 느껴지는지 온 세상의 비바람을 나 혼자 고스란히 맞고 있는것만 같다.


 사랑?

그따위 감정은 사치로 느껴질 뿐이다.

누구를 만나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낯선 이에게서 느껴지는 나와의 닮음, 그 공통과정을 찾아가는 설레임은 아주아주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대체 내가 호감을 느낄만큼 괜찮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앞으로 주어질수는 있을까? 나와 같은 나이 또래는 이제 아저씨, 선생님이 될 판인데 내게 설렘을 주는 이들은 모두 꽃미모를 뿜뿜하는 젊고 신선한 이들인데 말이다.


 거울 속의 내가 낯설다.

언젠가부터 거울을 보는 것도 싫고 겁이 난다. 거울속에서 날 낯설게 바라보는 너는 누구냐?

생기없는 얼굴, 탄력잃은 피부, 부스스한 머리, 선명하지 못한 흰자위와 빛을 잃은 두 눈동자, 웃지 않아도 드러나는 팔자 주름, 화장을 해도 감춰지지 않는 양볼에 선연한 기미와 주근깨. 무엇보다 삶에 쪄든 저 심드렁한 표정은 또 어쩌고..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화사하게 웃어봐도 어정쩡하고 어색한 아줌마만 보일뿐. 자꾸 거울을 보고 내 자신을 들여다봐줘야 나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데 중년의 나이는 그것조차도 어색하고 힘든 임파서블한 미션이 되어버린다.


그렇다. 나는 중년이다.

믿을수 없지만, 믿기 싫지만, 나에게만은 오지 않으리라 믿었지만 어느새 그렇게 세월은 흘러 난 지금 시간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는다.

 

 중년이 되었다는 신호는 신체적 변화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춘기가 신체적 성장과 더불어 정신적 혼돈이 오듯이 그렇게 중년도 신체의 기능성 저하와 더불어 정신적 황폐함과 비루함이 함께 온다. 굳이 갱년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중년이 된다는것은 생각보다 훨씬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린 모두 중년이 되기를 바란 적이 없고, 중년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으며 그에 대한 준비와 대비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춘기의 성적특징과 신체적 증상, 질풍노도의 시기에 대해서는 수없이 보고 들어왔지만, 막상 중년이 되었을때 그 특징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오히려 중년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은 중후하고 안정적이며 지적이고 온화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막상 중년이 되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악조건 속에서 이건 뭐 참담함을 넘어선 공포까지 엄습해온다.

그렇다. 중년은 그렇게 발란스를 맞춘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더란 말이다. 100세 시대를 사는 지금의 우리에겐 더더구나 냉정하고 암담하게 다가온다. 지독한 현실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며 좌절할수만도 없는게 이 중년은 누구에게나 온다는 사실이다.


나를 비참하게 하는 이 중년에서 스스로에게 몇가지 질문들을 해 본다.


나는 재정적으로 안정적인가?


헐. 이 질문에 자신있게 예스라고 답할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요즘 젊은이들의 금수저, 흙수저 얘기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오히려 지금 사십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야말로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지 못하고 누릴 혜택을 못 받으며 자라온 낀 세대들이다. 우리 윗세대들은 험난한 전쟁을 겪었지만 눈부신 산업시대의 성장을 지나 집 한칸이 주는 위안과 안락함을 누린 세대들이었지만, 우리 세대는 이미 오를대로 올라버린 부동산에 집한칸 내 손으로 마련하는 것의 그 고단함을 지독히도 느끼고 있는 세대들이다. 겨우겨우 마련한 집도 어디 내 집이더냐? 욕실 한개만이 내 집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머지는 모두 엄연한 은행소유다. 게다가 다달이 갚아야할 대출금과 카드할부금들은 다람쥐 쳇바퀴속에서 그나마 뜀박질을 멈추는 순간 정체가 아닌 도태가 되어 신용불량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가 된다.

 

'돈은 현관에 신발이 두켤레일때 버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있다.

살아보니 딱 그렇다. 결혼을 했다면 부부가 각자의 경제활동을 영위하며 살때 돈도 저축할수 있다. 자녀가 생기는 순간 돈이란건 그냥 내 손을 스쳐지나가는 숫자에 불과해지는 것. 우리 나이 중년이 되면 돈들어갈 곳은 최고조에 이른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느정도 자식에 대해 할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던 지난날과 다르다. 요즘은 학업도 길어지고 취업준비기간도 길어진만큼 그 뒷바라지를 부모들이 하고 있다. 취업하지 못하는 청춘들의 일이 어디 젊은이들만의 문제일까? 경제활동이 안되는 그들을 입히고 먹이는 사람은 누구겠는가?  
중년은 번듯한 회사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나이다. 후배들을 위해 나가줘야 하는 나이이며 제대로 된 줄을 잡지 못하면 스스로의 입지를 확보할수 없는 나이다. 멋지게 사표를 내고 나와 할수 있는 일은 자영업일 것 같지만 장사든 사업이든 자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죽어라 몸만 고생하다 빚만 지고 나오는 구조다. 그것도 초기자금이 있을때 얘기, 초기자금이 없는 사람들은 몸으로 때울 최저시급의 일자리를 전전하는 수밖에 없다. 일을 안할 수도 없고 몸은 점점 힘들어지고, 앞으로 살 날은 더 늘어나고 나를 쳐다보는 자식들은 다른 집 자식보다 부모 잘못 만나 기를 못펴는 것 같고 그렇게 된다.

부모세대의 상속을 바랄수도 없다. 막말로 이제 부모랑 같이 늙어가는 시대다. 육십대 자식이 팔구십대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시대인 거다. 아침 저녁마다 챙겨먹는 영양제가 누가 더 많은지 누가 더 아픈곳이 많은지 비교도 가능해진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을 팔아 부모 병원비를 대야 할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우리 중년이 가지는 부모와 자식에 대한 도리는 언제나 딜레마다.


부부관계는 좋은가?

 최소 십년, 이십년을 산 지금의 나이가 되면 부부는 그냥 남녀가 아니라 가족이 된다. 방도 각방을 쓰는 것이 훨씬 좋고 대화는 가능하면 안할수록 분란을 막을 수 있다. 각자의 집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도리만을 그것도 자기 집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게 매너다. 반찬이 입에 맞네 안맞네는 그야말로 간큰 남자들이나 할소리다. 바쁜 생활속에 각자의 음식은 각자 챙기는게 기본이다. 요즘은 마트 음식이며 편의점 음식은 또 얼마나 잘돼 있는가? 이혼안하고 같이 살아주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사는게 예의다. 중년들이 사는 집에서 때때로 밥하는 집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나도 처음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큰 아이가 고등학교 들어가고 대학에 들어가니 집에서 같이 밥먹을 시간이 없다는 걸 실감했다. 그나마 우리집은 나이차 많은 막내가 있기에 어쩔수 없이 아직도 밥을 챙기는 형편이다. 그런데 아이가 다 큰 성인이 되면 집에서 밥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이 된다는 걸 지난해 남편과 둘만 있으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밥통에 밥을 해도 다 먹으려면 며칠이 걸리고 반찬이라도 하겠다고 장을 봐오면 한번 한후 줄질 않으니 냉장고의 재료만 썩어나갔다. 그러니 차라리 나가먹거나 배달해먹거나 간편하게 바로 데우기만 하면 되는 레토르 음식을 사놓게 되더라. 그것이 훨씬 비용적으로도 생활적으로도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같이 밥먹는 시간이 줄어드니 대화할 시간도 줄어든다. 서로의 생활패턴이 다르고 관심사가 달라지니 그동안 억지로라도 맞춰가려던 노력도 시들해진다. 여태 노력해서 안된 일을 이제사 노력한다고 되겠나 하는 자조적 포기와 더불어 힘들게 노력할 그 시간에 잠이라도 조금 더 자고 책이나 차라리 인터넷 쇼핑을 더 하는게 낫겠단 생각이 드는거다.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고자 했던 화목한 가족의 모습, 인자한 부모의 코스프레도 다 벗어던지고 보다 내 자신의 안위에 충실해지게 된다. 그냥 부부는 아이들의 엄마, 아빠로서 존재할 뿐이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는건 바라지도 않는다. 상처와 아픔만이라도 안주면 그나마 다행인 존재가 된다.


꿈이 있는가?


 아마도 이것이 가장 큰 화두가 되지 않을까?

노인이 된다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꿈이 없는 것이라 했던가?

꿈꾸지 않는 자, 더이상 젊음이 아니라 했던가?

이젠 딱히 뭘 하고 싶다거나 뭐가 되고 싶다라는 꿈과 목표가 없다.

"OO씨는 앞으로 뭘하고 싶어요?"

최근 모처럼 본 면접에서 면접관은 내게 물었다. 열심히 입사기록표의 빈칸을 채워넣던 나는 움찔했다.

'내게 앞으로의 꿈이 뭐냐고 물어봤던 적이 언제였더라?'

너무나 까마득해 면접에서 일상적인 그 물음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은, 되고 싶은 걸 찾아 생각해보는 그 시간이 참으로 기분좋았다. 온전한 나로써 대접받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것만 같아서.

나는 내 나름대로 참 열심히도 살았다고 생각했다. 바쁜 와중에도 독학으로 피아노도 꾸준히 연습했고 배우고 싶었던 클래식기타도 조금씩 배워보고, 운동이 부족하다 싶으면 바로 조깅도 하고 요가도 하고 수영도 했다. 먹고 사는 걱정은 늘 있는 것이니 중간중간 사는것에 치여 소홀히 할때도 있지만 나란 인간은 원래 가만있질 못하는 성격이라 이런 내 성격이 지금의 내 팔자를 만들었다 자조하며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은연중 마음속에 또다른 나는 나에게 압박을 가해왔다.

'니 나이를 생각해. 지금 꿈을 꾼다는게 가능해? 다른 젊은얘들처럼 빠를수 있어?

눈도 침침해지고 행동도 굼뜨기 시작했어.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방금 가방에 집어넣은 핸드폰도 못찾아 다시 차까지 돌아갔다 빈손으로 오는 너잖아? 앞으로란 말이 너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해?

그거 다 미련이야. 네 나이를 생각하고 주제를 파악해. 말은 아끼고 허접한 너의 역량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서 물러나.'

그런 생각을 할때면 더없이 자존심상하고 서글프지만 한편으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중년의 멋이요, 꼰대가 되지 않는 관문이며 쿨하게 노후를 준비할 자세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러면 우리 중년은 무엇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즐거움도 반납하고, 미래를 향한 설레임도 고이 접어두고 뒷방 늙은이처럼 조용히 궁시렁거리며 그저 시간이 감을 견뎌내야만 하는 걸까?

그러기엔 지금의 세대인 우리 중년은 너무 젊고 쌩쌩하다. 옛날로 따지면 사십대인 지금의 우리 나이는 이제 서른 중반에 들어서는 나이가 아닐까? 서른 중반이면 인생에 있어 그야말로 황금기다. 뭐라도 시작할수 있는 나이, 충분히 매력적인 나이가 아닌가?

 

 그래서 난 사십대 중반인 내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이제 막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관념속의 나이'로 살기로 했다. 그런다고 뭐가 퍽이나 당장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을 하니 나는 꽤나 홀가분해졌다. 내가 '꿈꾼다는 것'이 더이상 사치가 아니라 느껴지고, 내가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이 더이상 늦었다고 생각되지 않으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어둠이 아닌 '밝음'으로 느껴진다.

나이란 건, 신체적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라고 그렇게 얘기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내가 직접 그 나이가 되지 않으면 그건 그냥 언어적 명제로밖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올것 같지 않던 그 나이가 나에게 허락도 없이 훌쩍 와버렸을때, 나라고 별수 없이 막연하고 두려운 현실속에서 그 분을 맞게 되었을때 누구나는 당황하며 절망감을 느낄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겪어가며 조금씩 조금씩 희망을 가지려 노력해본다. ''라고 별수 없지만, 또 ''이기에 가능한 '나의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중년의 나'는 '좀더 나다울 수 있는 나이'가 되기를 노력해보려 한다.  중년도 행복해질수 있다고 위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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