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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Jul 02. 2018

절박함은 사람을 강하게 하는가?

경험에서 우러난 일반화의 오류에 대하여

"여러분, 토요일밤 한국 축구 보셨습니까?

손흥민 선수의 눈물. 절박한 사람은 종일 그렇게 뛰어다니고 최선을 다하는데 구자철, 기성용 다른 선수들은 도저히 열심히 한다고 보기 힘들더군요. 4년전만 해도 반칙을 주는 심판한테 쌍심지 켜고 대들던 핏발선 구자철 선수의 눈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제 뭐 얻을거 다 얻었다 이거지요. 사람이 그렇게 절박함이 없으면 태도가 달라질수 있구나 전 그걸 느꼈습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실시되는 교육세미나 시간이었다. 국내외 각계 유명한 연사들의 강연을 인터넷을 통해 다함께 모여 보고 간단한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 업체가 교육컨설팅 업체를 표방하다보니 나름 이런저런 학습을 위한 장치들이 많았는데 그날은 내가 입사한 이후 세번째 시간이었다.

아마도 그날의 연사는 지금은 티브에서 자주 볼수 있는 한 중견 남성 배우였다. 6년간의 무명배우 생활을 거쳐 더이상은 희망이 없다 여겨진 순간 미국이민을 위해 출국했고 현지 도착한 첫날 호텔방에서 한국 제작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오디션을 보기 위해 다시 비행기를 탔다던. 수중에 가진 돈의 절반을 이코노미 좌석이 없어 비즈니스 좌석으로 거금을 주고 기꺼이 와서 절박함에 본인의 간절함을 어필하고 그로 인해 기회도 얻고 본인인생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맨 뒷자리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던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절박함이라고? 나만큼 절박한 사람이 있을까?' 

지난 이삼년의 시간동안 내 인생에도 흔히들 얘기하는 그 절박의 시간들이 잇달아 이어져왔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유겠지만 그 경제적 이유로 인해 사람의 자존감을 잃기는 누워서 떡먹기보다도 쉬웠다. 끊임없는 자기 컨트롤이 없다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절박함이 그 사람을 강하게 하던가? 지금 나는 얼마나 강해졌나?

그토록 원하던 정규직, 사무직에 다시 취업을 했으니 그간의 절박함으로 인한 간절함의 화답으로 보고 조용히 나 죽었소 하고 지내야 하는게 맞는건가?

그런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하고 이토록 괴로운건가?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는 이 갈등과 답답함속에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나의 몸부림은 절박함의 부족, 간절함의 부족인건가?

절박함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주변인들의 기대치와 다그침은 얼마나 가학적인가? 참 쉽게들 얘기한다.

지금 축구선수들에 대한 그 비교, 비난, 충고. 편안히 티비 앞에서 채널 돌려가며 입맛대로 찾아보는 우리들에게는 쉽게도 말할수 있는 것들이겠지. 본인들이 그만큼 뛰어봤는가? 훈련해봤는가?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리고 뼈가 부러져봤는가? 텅빈 운동장에서 울어봤는가? 가족들 생각하며 그 책임감에 가슴이 무너져봤는가? 하루하루 다를 운동선수들의 체력을 4년전과 비교할수 있는가? 정신력만으로 육체적 한계를 지배할수 있다고 믿는가? 그렇게 나불거리는 그대들은 과연 얼마나 절박해봤는가?


참 꼬였다 싶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

그랬다. 난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생활고, 갚아야할 빚, 책임져야 할 가족, 깊어진 부부간의 불화 그런건 사실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어느정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일만큼 반복적이고 일상화되었다.

올해 들어 가장 힘들었다 여겨졌던 지하철 매장에서의 추위도, 나를 속였다며 분개했던 이후 보험회사에서의 생활도, 조금 멀리는 그 종족들은 다 싸잡아서 망해버려야 한다며 분노에 떨게 만들었던 필리핀에서의 악몽도 어찌보면 지금의 생활만큼 답답하진 않았다.

영업이 되든 안되든 매달 따박따박 주는 월급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입사가 되면 당연하게 주어지는 4대보험, 너무도 당연한 주5일 근무와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여름휴가와 명절휴가를 찾아 이 회사에 입사했다. 내 나이 마흔여섯에 새파란 이십대들과 함께 차별없이 근무할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사무직으로 일할수 있다는 것 또한 꿈을 이룬 기분이었다. 그것도 컨설팅 회사에 말이다.


출근 첫날의 느낌은 사실 이후 회사생활의 압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첫날의 느낌이 회사 분위기 그 민낯을 드러내기 마련이고 숱하게 이회사 저회사를 경험해봤던 나로서는 그 느낌이 거의 백프로였다. 사실 두번의 면접을 위해 이 회사를 찾았던 경험에서 어느정도 예측은 했었다. 회사의 입지부터 어느정도는 대표의 성향이 파악된다. 모텔가를 지나 대로변 안쪽에 자리한 좁은 빌딩에 두 층을 임대한 사무실을 보면서 조금 난감하긴 했었다. 이런 경우 충분한 자본없이  자수성가했거나 아직 투자를 받지 못한 상태이거나 아니면 아예 받을 생각없이 있는 상황에서 아껴쓰는 짠돌이일 가능성이 컸다. 직원들이나 찾아오는 내방객들은 생각없이 본인만 괜찮다면 됐다는 식의 이기적일 확률도 어느정도는 짐작이 됐다.

입구부터 담배꽁초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들이 썩 유쾌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사무실은 입구부터 지문인식기와 벨이 있었고 안내를 위해 나온 직원의 포멀하지도 아주 노멀하지도 않은 옷차림과 머리등을 보면서 대충 분위기는 짐작이 갔다. 음료를 권하는 직원에게 물한잔을 요청했고 한참이 지난후에 가져다 준 컵에는 바로 씻은듯 물기가 그대로인 큰 머그컵에 물이 반정도 담겨있었다.

사실 그때 알았다. '여긴 아마츄어구나..'


대단한걸 바란건 아니다. 난 이런저런 회사도 경험해봤고 이런저런 가게도 운영해봤다. 이런저런 직원들과 일해도 봤고 이런저런 직원들을 채용하고 교육시켜 보기도 했다. 내 경험이 전부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꼰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이런 내 생각들이 꼰대라면 뭐 반격할 의지도 힘도 없다. 어쨌든 사소한 그런 것들이 보여주는 것들이 아예 없다고 말할수도 없다. 그때의 내겐 그 물기를 말리지 않은 컵의 물이 딱 이 회사의 분위기를 보여줬다. 불안감을 안고도 따박따박 주는 월급의 힘에 난 무릎을 꿇었다. 간절히, 절박하게 나인투식스의 근무시간과 정장입은 사무직, 그리고 그에 따르는 복리후생이 내겐 실로 오랜만에 너무도 그리웠다.


두번의 면접을 거치고 이십대 아이들과 똑같이 3개월 수습의 조건으로 입사를 했다. 입사 첫날 자기소개를 하라는 대표의 말에 세미나실 앞에서 인사를 했다. 그간의 연륜으로 조금의 떨림도 없이 차분히 눈을 마주치며 소개를 하는 그 순간 또한번 알았다. '아, 이 회사는 재미가 없구나.'

직원들 눈빛이 너무 흐렸다. 생선좌판의 물 다 빠진 물고기 눈들 같았다. 그 나이에 그렇게 심드렁하고 건조하기도 힘들다 생각했다. 그나마 또릿하고 반짝거리며 생글거리던 눈들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보다 일주일 먼저 들어온 신입들과 대표뿐이었다.

나름 카리스마 있다고 여기는 대표의 경영철학이 일단 나와 맞지 않았다. '적합한 인재'를 강조하는 그는 자기 입맛에 맞는 직원을 위해 열명을 채용해 한명이 남는다면 남는 장사라 여기는 인물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직원들에게 반말이었고, 이후 가진 몇차례 점심식사 자리는 언제나 회사근처 단골 고깃집 점심메뉴였으며 대낮부터 퍼런 소주병을 따서 돌렸다. 함께 있는 직원들의 고충은 아랑곳없이 본인 시간이 될때면 그런식의 자리를 굉장히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대화라고 할것도 없이 자기 위주의 이야기만을 쏟아내는 스타일이란건 최종면접때 파악했다. 상대방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회의시간도, 식사시간도 참 의미없고 맥락없는 본인 위주의 이야기들 뿐이었다. 딱히 내게 수습기간동안은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그의 말처럼 난 3주동안 매일 가망 고객사에 전화를 걸어 채용과 교육니즈를 물어보는 콜센터 직원이었다. 그것도 그 누구도 업무지시도 없었고 자료제공도 없이 그나마 경력자로서의 전직장에서의 경험을 통한 나 스스로의 자발적 업무에 의해서였다. 아침마다 진행되는 팀별 회의때마다 어제는 무얼했고 오늘은 무얼할 것인지 물어보는 상무의 말에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을수밖에 없었다. 일이 바빠 몇주째 주말을 쉬어보지 못했다며 울상을 짓는 옆자리 남직원은 울상짓는 얼굴뒤에 유능한 직원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진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모든 업무는 그 직원에게 몰려있었다. 그럴수밖에 없는게 일년 넘은 직원이 그 하나뿐이었다. 팀내 구성원 모두 입사 3개월을 넘긴 이가 없는 모두 새파란 신참들이었이었다. 게다가 모든 업무는 대표의 직속권한이었다. 아침 6시부터 울려대는 단톡방에는 대표가 보내는 업무지시로 빼곡했다. 밤 11시까지 업무를 보고하는 직원들의 카톡이 울렸고.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카톡은 울어댔고 결국 나는 그 피로감에 이틀만에 알람을 해제했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알람에 비해 내가 할 일은 초라하게도 없었다. 하루종일 콜컨택을 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게 다였다. 퇴근시간인 7시가 되면 퇴근할 생각들이 없이 다들 아침 7시마냥 책상에 앉아있는 분위기였다. 언제나 할일없는 내가 퇴근 첫주자가 되곤했다. 그런 눈치보는 문화 실로 오랜만이었다. 첫 직장이었던 95년도 회사 분위기가 생각났다. 그래도 그땐 층층시하 관리보고 체계라도 있었다. 여긴 모든게 대표권한인데 그렇게 서로들 감시를 했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육체적으로 힘든일은 없는데도 목이 뻐근하고 팔다리가 아프고 시간가는게 너무 더디게만 느껴졌다. 차라리 나를 기만했다고 생각했던 보험회사에서는 이런 루즈함은 없었다. 정신없이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성취감은 그때가 더 컸다. 이 고학력자들을 데려다놓고 이런 분위기속에 가둬두는 이 느낌없는 인테리어의 사무실 공간이 시간이 갈수록 더 감옥처럼 느껴졌다. 처음 이게 마지막이다, 여기서 온전한 내 아이템과 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퇴사하지 않겠다던 다짐은 하루가 다르게 1년만, 6개월만, 아니 3개월 수습후 온전한 월급 받을때까지만에서 한달을 채워 수습월금만이라도 받을때까지만으로 바뀌다 어느날은 당장 집어치우고 이 아까운 시간에 차라리 내 사업을 하자로 바뀌었다.


그렇게 입사 3주만에 나는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숨이 턱까지 차올듯 답답함에 미쳐버리기 전에 나왔다. 나의 입사를 축하해주며 부러워했던 보험회사 동기들에게는 쪽팔려 말도 못하고, 가까운 가족들에게도 차마 말할수 없어 조용히 숨죽이며 지내고 있다. 하하

그런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지금 내가 한 행동들이 과연 절박함이 부족해서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 참 저마다 꼴린대로 사는거다. 그 꼴린대로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한데 그 잘난 자존심, 주변인들의 시선이 내게도 그리 자유롭지 못했나보다.

교육컨설팅 업계 있으면서 정말 그런게 싫었다. 같잖은 잘난척들. 학력위주의 평가들. 알고보면 신입직원들 빼고는 학부는 그냥 그런데 석사만 그럴듯한 학력세탁범들이 천지인데 자기 생각들은 참 안하고 남들 까내리는 것만 좋아하는 것이 그곳이다. 학자 스타일들은 너무 고지식하여 답답하고, 적극적인 영업방식의 경영자스타일들은 교육업계에서는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비투비 사업에서 클라이언트들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교육담당자들인데 그들은 교육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뭔가 있어보이고 가르침을 받을수 있을듯한 말투와 외모, 현학적 느낌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교육컨설팅 업계는 그래서 '위선덩어리'들이다.


이번 직장으로 인해 부쩍 가까워진 남편은 말한다.

"다시 직장생활을 하기엔 넌 이미 너무 멀리 돌아나왔어. 다시는 갈수 없어.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고 네 것을 해."

이제 그만, 알바천국과 알바몬을 지우고, 사람이과 잡코리아도 지우고 내가 신나서 하고 싶은 걸 하자. 매달 옥죄어오는 이 카드빚들과 공과금과 학자금에서 조금은 자유로와지도록 노력하자. 난 어차피 그렇게 살수 없는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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