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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Feb 27. 2019

유머있는 삶

유머를 가졌다고 말할수 있다면 나는 이제 인생을 알았노라 말하고 싶다.

 

내 삶에 부족한 많은 것들이 있지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그것은
 '돈'도 아닌, '유머'라 하겠다. 


 타고 날 때부터 시니컬한 생각의 습관이 몸에 밴 강씨와 길씨 집안의 유전자를 안고 태어난 이유도 있겠고,

자라면서 풍족하지 않았던 환경탓도 있겠다. 수많은 이사를 했지만 이사한 곳마다 문화생활이나 지적 환경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가 만연한 각박한 동네였던 탓도 있겠다. 명절때조차도 친인척들의 왕래가 없어 썰렁했던 집안 분위기에서 탈피하고 싶어 어릴 때부터 책에 빠져 지냈던 특유의 조숙함이 가져온 우울함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 시절 읽었던 책들이 꼭 슬프고 비관적인 책만 있었겠냐마는 언젠가는 책 속 비련의 주인공처럼 무척이나 슬픈 인생을 살 것 같다는 어줍잖은 나의 슬픈 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면 차라리 그것이 어떤 예술적 경지로 승화되어 나름 아티스트로 살고 있었을 수도 있었으련만, 이 타고난 유전자는 지독히도 현실적인 길씨 집안 어머니의 성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오히려 주변에 현실적이지 못한 이들에겐 어김없이 정신차리라며 그게 말이 되냐는 일갈로 이어지곤 했다. 

그 현실론자는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서 이 세상이 만들어놓은 잣대에 충실하며 고분고분 살아야 마땅했을것이나, 어찌하여 속세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멈출 줄 모르고 이 끝과 저끝 사이 그 어느 지점에서 서성이며 어느새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되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변화속에서 조만간 사이보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며 벌써부터 자손보존의 의미를 내던지고 있는 다음 세대들을 보며 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건지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나는 아직도 '방황하는 중년'이다. 


 출신 지역이나 학연 등의 인맥을 내세우며 관계에 목숨거는 이들을 경멸하면서도 소위 남들이 말하는 번듯한 직장생활을 유지하지 못하고 언제나 다른 일을 찾아 기웃거리는 그 어느 쯤에는 그놈의 고리타분한 인맥의 절실함을 느끼고 버티지 못한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 아닌 후회를 하기도 한다. 

어차피 이 세상이란 건 어찌하다 생겨난 것이고, 그 안에서 살아남은 인간이란 종은 특유의 이기적 유전자로 악랄하게 살아남아 이어오고 있는 건데 살아남은 이들의 권력층들이 그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제도와 관습에 대중들은 어쩜 그리도 의심의 여지없이 맹신하고 복종하며 남들과 같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것인지 나이가 들고 세상의 이치를 하나씩 깨달아갈수록 이해할 수가 없다. 법과 제도, 관습과 규범, 도덕과 사랑. 그 모든 것에 대한 기준은 결국 사람이 살면서 질서유지를 위해 하나씩 만들어냈고 그것이 세월의 때가 쌓이며 켜켜히 굳어져 간것일 뿐인데 왜 우리는 그것들에 집착하고 벗어난 삶에는 불안해하며 불행하다 느끼는 것인지.


인생이란 건 그 어느것 하나도 그리 대단한 게 없는데 뭘 그리 무겁게 받아들이고 짓눌리며 사는 걸까?

무에 그리 무게잡을 일도 걱정할 일도 아닌데 왜 우리는 그 안에서 가벼움을 잊어버릴까? 

결국 그 '가벼움'이란 건 어찌보면 현실을 비트는 위트와 유머로 대변되는 것이고 진정한 유머란 차가운 이 현실을 초월한 관념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지지 못한 유머는 내가 이 만들어진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길들여진 채 허덕허덕 끌려다니고 있다는 증표가 아닐런지 뒤돌아보게 한다. 

현실을 풍자한 유머든, 비틀고 쥐어짠 냉소든 지금의 내겐 위트가 무척이나 절실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쨌든 나는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이 험난한 길을 달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경험과 도전, 가뭄에 콩나듯했던 성공과 널부러져 깔렸던 많은 실패속에서 결국 내가 찾던 파랑새는 '유머', 곧 '즐거운 인생'이 아니었을까? 


 애정하는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의 지난 작품들을 읽으면서 위트의 힘에 대해 좀더 많은 생각을 했다. 물론 그가 사는 곳과 내가 사는 곳의 환경과 문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위트를 제대로 완벽히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여러권 읽으면서 서서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하. 이런게 냉소적 위트라는 거구나.'

뭐랄까. 인생에 대한 참으로 세련된 은유와 비틀기라고나 할까? 

물론 그 위트를 치는 사람도 상대방이 바로 이해하고 받아주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썰렁개그, 내지는 아재개그로 전락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어쨌든 그의 작품에선 모두가 지식인이고 꽤나 상류층이며 지적으로도 뛰어난 사람들이라 냉소적 위트에 대해 이해못할까 걱정하는 건  나만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최근 영화 '극한직업'이 한국 영화 역대 흥행순위 2위를 갈아치웠단 기사를 보고 남편과 얘기를 나눴다.

"히야. 정말 대단한걸. 이 영화가 이렇게 잘될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도 1500만은 좀 심한거 아냐?"

"하긴, 뭐 작품적으로 그만한 평가를 받을만한 영화는 아닌거 같긴 해."

"2위라니. 신과 함께도 제치고 승승장구네."

"사실 흥행순위라는게 꼭 작품성과 연관성 있는건 아니니까. 개인적으론 신과 함께보단 훨씬 높게 평가하고 싶네. 작위적인 감동과 슬픔, 뻔한 권선징악보단 유머의 힘이 훨씬 크고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랬다. 내가 최고로 치는 영화는 '인생은 아름다워'다. 

그 절박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죽어가면서까지 아들에게 유머를 잃지 않았던 주인공이 준 감동은 지금도 뜨겁고 슬프게 내 가슴에 남아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어쨌든 희극처럼 살고 싶다. 이 세상 한바탕 신명나게 놀다갔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은 망자에게 가장 큰 칭찬과 위대한 평가가 아닐까. 유머와 위트가 내 삶으로 들어와 녹아주길 기다려본다.  한 많은 이 세상, 뭐 그리 심각하게 산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지 않은가..



이 시대의 선과 악은 착하고 나쁜 것이 아니다.

지루한 것이 악이고 즐거운 것이 선이다.

-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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