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야채이야기
언니, 사탕옥수수 먹어봤어? 오일장에 팔아. 진짜 달아~
정확히 7년전, 첫번째 제주살이때 알게 된 동생은 육지에선 미처 먹어보지 못한 이런저런 농수산들을 제게 알려주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주 생선이라곤 갈치와 조기, 고등어로만 알고 있던 제게 볼락이니 자리돔이니 열고기니 달고기들을 나눠주며 이름을 알려주고, 한여름 보말과 황게를 잡으러 바다로 데려가고, 봄이 되면 꺽은 고사리를 데쳐 먹어보라며 건냈습니다. 저와 같은 육지 출신으로 제주 온지 얼마 안 되었던 그 친구는 어쩜 그리도 아는 것이 많았는지 그 친구를 통해 제주의 사탕옥수수도 알게 되었지요. 사실 정식 이름은 '초당옥수수'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재입도 후 농수산 유통일을 하게 된 저희는 좋은 품질의 농수산을 찾아 제주 각지를 돌며 발품을 파는 게 주된 일이 되었습니다. 그전까진 귤과 한라봉밖에 몰랐던 과일류도 황금향, 천혜향, 레드향, 한라향, 카라향까지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밭에서 나는 야채들은 또 어떤가요? 제주산 무와 당근밖에 몰랐던 저에게 지난 봄은 겨울에도 따뜻한 땅에서 자란 콜라비와 방울양배추,비트, 콜리플라워까지 새로운 야채들과의 만남이 이어진 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봄이 지나 여름이 오려는 초입에서 사탕옥수수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근 2~3년내 이 초당옥수수의 인기는 급상승했던가 봅니다. 우리가 제주를 잠시 떠나 육지에서 치열한 삶의 전투를 치뤄내고 있을 때 제주의 농수산물들은 육지와 보다 가까워졌고 그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도 보다 많아졌던 것이겠지요. 그리하여 올 유월, 제주 서쪽은 옥수수로 뜨겁습니다.
저의 친정은 강원도 춘천입니다. 엄마, 아빠 두 분 모두 강원도 태생으로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강원도 옥수수를 먹으며 자랐습니다. 매년 뜨거운 여름이 되면 외갓집에서는 갓 딴 찰옥수수를 마당에 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커다란 솥에 쪄내었습니다. 방금 쪄낸 뜨거운 옥수수를 호호 불어가며 앉은 자리에서 대여섯개씩 먹어치우고도 저녁밥을 먹고 후식으로 또 먹곤 했었지요. 찰옥수수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더랬습니다.
옥수수는 다 그렇게 쫀득쫀득한 찰옥수수만 있는 줄 알았던 제게 새로운 옥수수의 경험은 미국에서였습니다. 미국 서부에서 일년 살던 때, 먼저 정착한 한국인 언니는 한국마트에서 파는 옥수수를 사들고 왔더랬습니다. 그러더니 옥수수를 전자렌지에 넣고 돌려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아무리 밥하기 귀찮아하는 사람이라지만 옥수수를 찜기에 찌지도 않고 저리 짧은 시간만 렌지에 돌리면 익기는 하는건가 싶어 의아했었지요. 그런 제 앞에서 그 언니는 샛노란 옥수수를 전자렌지에서 꺼내어 아삭거리며 순식간에 먹어치웠습니다.
"이게 미국 옥수수야."
언니는 제게도 옥수수를 건넸고 옥수수를 받아든 저는 샛노랗고 무른 알을 보며 한입 베어 물었습니다. 달콤한 맛과 함께 담뿍 머금고 있는 수분, 그리고 옥수수대의 설익은 풋내가 함께 느껴졌습니다. 그전까지 먹던 쫀득한 강원도 찰옥수수가 그리워지는 맛이었지요. 미국 옥수수를 좋아하리라 기대했던 그 언니는 절 촌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이번에도 별 큰 기대가 없었어요. 칠년전 제주 오일장에서 사먹었던 사탕옥수수도 예전 미국에서 먹었던 옥수수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던 맛으로 제 기억속에 남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 입맛이 변한 걸까요? 아님 그동안 제주 옥수수의 재배법이 향상하여 더 맛있어진 까닭일까요? 여기저기 초당옥수수 얘기가 나오고 인터넷 후기들을 보면서도 왠 호들갑들일까 싶었는데 이번에 밭에 가서 실한 아이들을 만져보고 그 중에 한개를 따서 껍질을 벗겨 그 자리에서 생으로 베어문 저는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예전에 알던 맛과는 또 달랐습니다. 이렇게 여물고 달디단 맛이었던가..
제주란 땅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식물들은 이리도 여물고 달 수 있는 걸까요? 물론 종자가 다르고 그 종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땅의 조건이 다르니 그 궁합에 의한 것이겠지만, 제주의 야채를 하나씩 알아갈수록 이 육지인은 그저 감탄만 나올 뿐입니다. 하긴 야채 뿐일까요? 이 땅의 돼지고기도 바다의 물고기도 맛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것들 뿐입니다. 그동안 제가 미처 몰랐을 뿐이겠지요. 야채 본연의 맛은 과일처럼 이리도 달았던가 봅니다.
지인들에게 보낼 옥수수를 따서 다듬는 손이 분주해집니다. 제가 느낀 이 새로운 맛을 강원도에 계신 친정엄마에게도 보여드리고 별내에 계신 큰형님에게도 보여드릴 생각에 신이 납니다. 2-30분씩은 압력솥에 삶거나 찜기에 쪘던 찰옥수수에 비해 우선 조리법이 너무도 간편합니다. 2-3분만 렌지에 돌리면 끝, 찜기에도 10-15분이면 충분합니다. 식이섬유가 많으니 소화에도 좋고 과일만큼 단 맛에 먹는 일도 즐겁습니다. 개당 가격이 쎄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이 또한 한달동안만 누릴 수 있는 호사에 비하면 그럭저럭 참아줄만 합니다.
택배로 보낸 옥수수를 드신 큰형님은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맛의 신세계야."
먹을수록 사탕처럼 음미하게 되는 맛, 그래서 이 옥수수는 '사탕옥수수'가 맞습니다.
귀한 옥수수 철 지나기 전에 얼른 또 따러 밭에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