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은 줄지 않는다

삶의 비용

by jiwu

법학자 김두식 교수는 <불편해도 괜찮아>(2017)에서 "사람마다 평생 치를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썼다. 한겨례 [정문정 작가의 대화의 발견]의 '멀리 돌아서 온 집'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덧붙였다. 젊을 때 실수를 많이 했으니 나이 들어서는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그 문장을 읽으며 꽤나 안도했다. 과거 내가 했던 실수들, 엉뚱한 판단, 부끄러운 순간들이 그 총량을 채워가는 과정이었다면, 남은 인생은 좀 더 단단하게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일상을 다시 떠올려 보면 그 믿음이 그저 희망사항에 가까운 건 아닌가 싶어진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아, 바보같이 굴었네.' 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오래 만난 친구와 편히 대화하다가도 엉뚱한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가족에게는 하지 않아도 될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바로 눈앞에 둔 안경을 찾느라 집안을 뒤집어 놓는 사소한 실수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일들을 떠올리면 '지랄 총량'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실수는 줄지 않고, 새로운 형태로 계속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총량의 소모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실수'를 계속 행하며 살아가는 과정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같은 어리석음이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조금씩 형태가 바뀐다. 예전에는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문제를 만들었다면, 지금은 과하게 걱정하다 도리어 일을 망치기도 하고, 더 배려하려다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젊을 때의 지랄이 거친 돌멩이였다면, 나이 든 후의 지랄은 다듬어진 조약돌처럼 보일 뿐 본질은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하지만 이 반복되는 실수들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수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 배움이 생각보다 오래 걸릴 뿐이다. 어떤 말투는 관계가 틀어지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렇게 보면 지랄 총량이란 것이 애초에 고정된 수치라기보다,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삶의 비용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고 싶다. 실수는 내가 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감정 속에서 새로운 실수가 등장한다. 만약 내가 더 이상 어떤 바보짓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면, 그건 어쩌면 변화도 성찰도 멈춘 존재가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실수를 온전히 긍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어리석음 속에서 스스로를 미워하는 대신, 그 순간을 이해하고 다음을 조금 더 조심하는 태도만이 현실적인 처방일 것이다. 지랄은 줄지 않지만, 그 지랄이 관계를 덜 틀어지게 하고, 스스로를 덜 괴롭히는 방향으로 변할 수는 있다. 실수의 크기는 줄지 않아도, 실수를 대하는 마음의 크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이란 존재가 완벽해질 수 없기에, 앞으로도 계속 바보짓을 할 것이다. 다만 그 실수가 어제의 나와 다른 모습이기를, 그리고 그 실수가 나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삶을 생각해 보면, 실수는 줄어들지 않고 형태만 달라지는 일종의 변주곡이다. 변주가 있다는 건 음악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불안전함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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