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하늘은 흐리고 나무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뭔가 심상치 않아 일기 예보를 찾아봤다.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비 온단다. 그 순간 창밖에 내놓은 화분이 떠올랐다.
올해는 아이들과 함께 반려식물을 키운다. 4월에 아이들과 봉투 화분에 자기가 키우는 식물을 그리고 씨앗을 심었다. 화분에 물을 주고 볕이 잘 드는 교육복지실 창가에 두었다. 신기하게도 2주가 지나자 아이들의 화분에서 싹이 뜨기 시작했다. 어느새 새로운 잎이 자라고 줄기가 굵어졌다. 지금은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다.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교육복지실에 온다.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한다. 자기가 기르는 식물에 물을 주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자기가 키우는 식물이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한다.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생겨서 좋은지 반려식물을 보는 아이들의 눈은 반짝거린다. 잊지 않고 물 주러 오는 아이들이 기특하다.
"선생님 많이 자랐어요."
"토마토 줄기에 노란 꽃이 피었어요."
"선생님 여기 꽃봉오리 보이죠? 곧 꽃이 피겠어요."
아이들이 물 주러 올 때마다 관찰 일지를 쓴다. 씨앗을 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기 식물을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고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을 보면 새끼손가락 길이 정도였던 줄기가 어느새 한 뼘이 되었고 지금은 아이들 팔만큼 자란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파라노마 같은 것이다.
반려식물 키우기는 아이 키우는 것처럼 기다림의 연속이다. 처음 씨앗을 심을 때 혹여나 싹트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실제로 어느 한 아이는 자기 것만 싹트지 않아 속상해했다. "기다리면 싹틀 거야.", "물 줄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라고 응원해보는 건 어때." 실망하는 아이를 격려하며 매일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싹트기를 기다렸다. 싹트길 기다리면서 유독 볕이 잘 드는 곳에 화분을 옮겨주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창문을 열었다. 비록 식물이지만 애정을 쏟았고 기다린 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자랐다. 싹 트리라 믿었기에 기다릴 수 있었다.
"이왕이면 토마토가 열리고 해바라기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요즘 정성을 쏟아 키웠는데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하면 어쩌나 싶다. 기대하는 마음이 커 갈수록 걱정이 는다. 솔직히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살짝 부담이 된다. 농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겠다.
올해는 농사꾼 부케로 살고 있다. 어느 날부터 출근하자마자 밤새 안녕한지 화분부터 살핀다. 창문을 열고 햇빛을 더 많이 받으라고 창밖에 내놓는다. 흙이 말라 있어도 축축하게 젖어있어도 걱정이다. 시든 잎은 따주고 잎이 축 늘어져 있으면 아이들이 오기 전에 물을 준다. 나도 모르게 한 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고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1년 농사 망치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이러다가 창밖에 둔 화분이 떨어졌을까 봐 걱정했다. 안절부절 노심초사 아침이 밝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2층에서 떨어진 화분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가뜩이나 해바라기 줄기는 길어서 쉽게 꺾일 텐데. 화분에 비 맞으면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번져 지워질게 분명했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서 출근했다.
다행히 화분은 창밖에 고스란히 있었다. 화분을 보자마자 안심했다.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허탈했다. 바람에 화분이 넘어져 2층 아래로 떨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하마터면 1년 농사 망칠뻔했다. 고작 화분 몇 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몇 마지기 농사짓는 사람들은 매년 어떻게 살까 싶다.(앞으로 반찬 투정하지 않겠습니다.)
아이들의 애정과 관심으로 무럭무럭 자라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리고 꽃봉오리에서 해바라기 꽃이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