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날 아내는 아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했다. 둘째와 셋째를 일찍 하원시켜 다 같이 놀까 생각했지만 아내는 동생들에게 치이는 첫째와 오롯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유호야, 내일 뭐 하고 싶어?" 그날 아내는 아들에게 조용히 다가가 뭐 하고 싶은지 물었다.
"모악산에 가면 안 돼요?"
아들은 아내에게 모악산에 가자고 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산에 가겠다고 한 아들의 대답에 놀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들이 모악산에 가고 싶어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며칠 전 아내가 아들에게 모악산 정상에서 찍은 친구 사진을 보여줬다고 한다. 아들은 해발고도가 새겨진 비석에서 사진을찍은 친구를 보고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친구와 똑같이 하고 싶은 마음에 모악산에 가겠다고 한 것은 아닐까. 친구 따라 강남이 아니라 모악산에 간다는 말이 되었다.
모악산은 해발 793.5m에 달하는 산이다. 보통 산 이름에 '악' 자가 들어가면 등산인들에게 힘든 산으로 불린다. 모악산 역시 등산로는 가파르고 구간에 돌이 많다. 그나마 일부 구간에 계단이 설치되어 산행하기 편해졌다. 주로 구이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대원사와 수왕사를 거쳐 정상에 오른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약 3km이며, 왕복으로는 대략 3시간 정도 걸린다. 다시 출발 지점으로 회귀하는 코스가 제일 만만하다. 종종 시내버스를 타고 구이 주차장에 가면 반대편 쪽인 금산사 쪽으로 내려갔었다.
2024년 5월 1일, 아내와 함께 첫째 아들을 데리고 구이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들과 산에 오르는 것은 처음이라 정상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들이 힘들다고 하면 도중에 내려오려고 마음먹었다.생각해 보면 9살에게는 모악산에 오르겠다는 마음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산을 함께 오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 정상에 오르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 대원사까지 갈 생각으로 모악산에 올랐다. 아들과의 첫 산행에 의미를 두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오래전부터 아들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해보는 것이 꿈이었다. 중학교에서 교육복지사로 일하면서 처음 지리산 종주를 하게 되면서 생긴 버킷리스트였다. 4년 동안 매년 여름방학이면 선생님들과 함께 학생들을 데리고 2박 3일 동안 지리산 종주를 했다. 5년 전의 일이지만 지리산의 아름다움과 함께한 사람들과의 소중한 추억은 아직도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 마지막 해 천왕봉에서 바라봤던 일출, 여명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학생들과 함께 산행하면서 서로 친해졌고, 선생님의 꽃나무에 대한 이야기와 해설은 특별했다. 지리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도와주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단순히 산을 오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아들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되돌아보면 산과의 인연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서른 즈음에 처음으로 작정하고 산에 올랐다. 친구들과 30대에 들어서는 것을 기념하며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내기를 했었다. 그때 왜 산을 오르겠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산 10개를 오르겠다는 공약을 했다. 그때 산의 매력에 빠졌다. 꾸역꾸역 나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산이 좋아졌다. 산행은 힘들지만그만큼 보람도 크다. 정상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마도 첫 산행에서 느꼈던 감동과 성취감으로 산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다.
1시간 30분 만에 모악산 정상에 올랐다. 생각보다 산에 잘 오르는 아들에게 연신 감탄하다 보니 어느새 산 정상에 도착했다. 대원사에서 돌탑을 세우며 소원을 빌었고, 정상까지 1.5km 남았을 때 정자에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수왕사에 도착해 약숫물을 빈 생수통에 채웠다. '대단하구나!' 오가는 등산객의 응원을 받으니 힘든 줄 몰랐다. 아들과 함께 산에 오르는 경험이 신선했다.
아들과 함께 한 작은 성취는 더 큰 도전을 이끌어냈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투정 부리지 않고 씩씩하게 걷는 아들을 보고 앞으로 산에 데려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미리캔버스로 만든 지도를 아내에게보이며 등정 챌린지를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