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은행잎을 낚아채려는 아이들로 학교 언덕길이 복작였다. 그 시작은 누구였는지 알 수 없으나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로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 때문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은행잎이 내 손위에 고이 떨어져 잡을 확률은? 수학을 못해 공식으로 풀 수 없지만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래서 고심 끝에 친구들의 첫사랑이 이뤄지길 바라며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아이들을 나무 아래 포진시켰다.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냅다 나무 기둥을 발로 걷어차자 은행나무 가지가 휘청이더니 우수수 황금빛 은행잎이 떨어졌다. 친구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며 은행잎을 잡으려 손을 뻗었고 난 흐뭇하게 그 광경을 지켜봤는데 유독 슬로 모션이 걸린 듯 살랑살랑 내려오는 은행잎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건 잡아야 돼. 나도 은행잎을 하나 잡았다. 샛노란 예쁜 잎은 아니었다. 거무죽죽했지만 비주얼이 전부는 아니니까, 고이 말린 뒤 코팅까지 해서 좋아하던 소설책 사이에 꽂아 두었다.
뭔가 어른이 되어 엄청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한 번씩 은행잎을 꺼내봤는데 집에서 한 셀프 코팅이라 공기가 들어갔나 아니면 은행잎을 덜 말렸나 썩고 말았다.
그때 은행잎을 낚아챈 친구 중 하나가 강주였다. 강주의 외모는 전형적인 모범생 재질이었다. 안경에 똑 단발, 흰 피부를 가졌던 강주. 그녀는 내가 발길질로 떨어지게 만든 은행잎을 소중히 보관했다. 비록 내 잎은 썩었지만 강주의 것은 샛노랗고 싱그럽기까지 했는데 문방구에서 돈을 주고 코팅을 해서인지 짱짱했다. 이래서 돈을 써야 하는구나. 나는 한 번씩 강주가 은행잎을 꺼내볼 때마다 곁눈질로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강주는 보부상처럼 온갖 물건을 가지고 다녔는데 코팅한 은행잎은 물론이고 소화제, 대일밴드, 마데카솔 같은 의약품과 우산, 십팔 색 색연필과 자, 풀, 가위에 오색 볼펜까지 없는 게 없었다. 난 속이 더부룩할 때면 강주에게 소화제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강주는 소화제를 주며 작작 처먹으라며 한 소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보부상 강주는 다양한 펜시 제품으로 노트필기를 했는데 화려함의 극치였다. 글자체도 반듯하고 예뻐서 악필인 나는 강주의 노트를 훔치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났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강주에게 혹시 노트를 하루 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거절당할 것을 예상했는데 강주가 흔쾌히 그래 잊지 말고 내일 갖고 와하며 노트를 주는 것이 아닌가!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하곤 집으로 와 비밀문서를 보듯 조심스레 그녀의 노트를 펼쳐보았다. 정갈한 글자체와 중요 부분은 유색의 볼펜을 사용하여 강조해놓은 것이 역시 모범생의 노트 답다고 생각될 때쯤..... 내용이 좀 이상했다.
사회과목 노트였는데 수업내용이 적혀있다가
'급식엔 왜 스팸이 안 나오는가' '캔을 따기 힘들어서' 같은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가 적혀있기도 하고 '오빠... 아 오빠..'같은 의식의 흐름대로 써갈긴 글귀들이 참 예쁘고 반듯하게 마치 사회 수업내용의 일부인양 적혀있었다. 나는 힘이 쭉 빠졌다. 어쩐지 한 페이지를 채우기도 어렵던 수업에 강주는 두세 페이지를 넘기며 적길래 내가 놓친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강주는 외모만 모범생, 성적은 바닥이었다. 내가 강주의 노트를 빌렸다고 설레서 다른 친구에게 자랑할 때 그걸 왜?!라고 물었는데 이래서였나. 그래도 나는 강주의 노트를 키득거리며 끝까지 읽었다. 강주의 무의식을 엿본 것 같아 흥미로웠다.
그 후 두 번 다시 그녀의 노트를 빌리지 않았지만 가을이 되어 바닥을 나뒹구는 노란 은행잎을 볼 때면 강주의 코팅된 빳빳한 은행잎이 떠올랐다. 그녀는 과연 첫사랑을 이루었을까. 노트 속 오빠... 아... 오빠와 행복한지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