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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와 피자

늦가을의 추억

by 이지속

대학원 시절이 괴로웠기에 언급하기조차 싫지만 유독 잊히지 않는 누군가의 표정이 있다. 나는 늦가을이 되면 으레 그녀의 표정이 떠오르곤 했는데 이제부터 친애하는 여러분과 그 추억을 나눠보려 한다.

시론수업을 들었다. 필수 수업이었고 석박사 통합과정이라 박사과정을 밟는 선배언니들이 여럿 있었다. 시도 못쓰는데 시론을 배우자니 통 뭔 소린지 몰랐고 처음 들어보는 철학자 이름에 머릿속에선 지진이 나곤 했다. 시론 교수님은 이십 대 초반에 메이저 신문사에 시로 등단한 천재 시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내가 보기엔 그저 담배냄새를 폴폴 풍기는 중년 아저씨였는데 같이 공부하는 언니들이 그렇다니 좀 대단해 보이긴 했다.

늘 존댓말을 썼으며 예의가 바른 분이었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뿜어냈으며 카리스마까지 있었다. 나는 아는 게 없으니 의견도 없었고 이해력도 심하게 딸렸기에 교수님의 질문에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자리를 지켰다. 웬만하면 한소리를 할만한데 넓은 아량으로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런 성품이다 보니 제자들은 신춘문예 시즌이 되면 교수님께 시를 봐주십사 찾아오곤 했다. 보통 개인적으로 만나 의견을 듣는다는데 무슨 영문인지 처음 보는 한 선배언니가 수업 중에 교수님을 찾아왔다. 그녀의 손엔 커다란 피자박스가 들려있었다. 수강생이 10명이라 늘 의자를 둥글게 배치해서 앉았는데 마침, 내 맞은편 자리가 비어 언니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피자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급 허기가 졌다. 그 언니는 교수님과 미리 이야기가 된 듯 후배들에게 피자를 주고 싶어 왔노라 밝히며 피자 상자를 열었다.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던 사람들이 막상 상자가 열리자 모두 조용해졌다. 그리고 선배 언니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커다란 상자 속엔 상자의 반도 채우지 못하는 작은 피자가 빼꼼히 자리했다.

그 순간 작은 피자의 조각을 재빠르게 세었다. 사람은 열명이 넘는데 피자는 여섯 조각이었다. 피자를 자를 가위도 없었다. 눈치 빠른 몆 명의 선배들이 점심약속이 있다며 피자를 양보해 나는 한 조각을 맛볼 수 있었다. 언니는 피자 과대광고에 제대로 낚인 듯 정말 민망해했고 다른 학우들이 담소를 나누며 피자를 먹는 동안 교수님은 언니가 써온 시에 빠른 피드백을 주었다. 두 사람이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었기에 무슨 말이 오가는지 듣지 못했다.

이듬해, 그 언니가 메이저 신문사에 시로 등단해서 그 자리에 있었던 후배들에게 굴욕을 만회하듯 파파존스 미트피자 패밀리 사이즈를 한 판씩 선물해 줬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등단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신춘문예는 로또보다 되기 힘든 일인가 보다.

간절함으로 교수님께 시를 한번 봐주십사 찾아온 언니와 한없이 작았던 피자 생각은 그 후 신춘문예 공모 시기가 되면 늘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한 손에 든 피자 상자가 있다. 문학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응당.


사진은 최애 파파존스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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