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집사와 나만의 암호
이 글은 반려견인,
라울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 이야기입니다
【 내 이름은 라울, 나는 반려견이다 】
2부-웃음과 사건이 있는 일상
열 번째 이야기-볼이 얼얼해도 좋아
“우와! 바람이다, 시원한 바람이야!”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부드럽게 스치는 공기가 풀잎과 흙, 사람, 다른 개들의 향기를 한꺼번에 실어 나른다. 코끝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린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냄새가 있다니, 하나하나 다 맡아보려니 숨이 모자랄 지경이다. 혀끝에는 바람의 차가운 맛이 감돌고, 귀 끝이 가볍게 펄럭인다. 햇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얼굴 위를 지나가고, 세상은 물결처럼 흘러간다.
가족들은 내가 드라이브에서 느끼는 이 벅찬 설렘을 알까?
차 안에 흐르는 음악, 창밖의 끊임없이 변하는 색,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윤 집사의 손이 머리 위를 스치면 눈꺼풀은 서서히 내려오고, 엔진 소리는 자장가처럼 잔잔하게 깔린다. 차체의 미묘한 진동은 마치 아기 시절 엄마 뱃속에서 들었던 심장 박동처럼 포근하다. 그러다 차창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모공 하나하나를 깨우는 순간, 완벽한 행복이 찾아온다.
우리는 사람처럼 지도를 그리지 못한다.
대신 시각, 청각, 후각을 총동원해 길을 기억한다. 특히 후각은 사람보다 만 배 이상 예민하고, 청각은 초음파 영역까지 감지하니 믿음직한 길잡이다. 공원에 가면 나무와 풀, 흙이 뒤섞인 냄새가 퍼지고, 건물 모양이나 나무 위치를 단서 삼아 방향을 짐작한다. 발밑에서 전해지는 흙의 온도,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새소리까지, 세상은 나만의 입체적인 지도로 그려진다.
감각 위에 감정이 더해지면 기억은 오래 남는다.
할머니 댁에 가까워지면 단번에 알아챈다. 할머니 집만의 온기 어린 냄새가 제일 먼저 나를 맞아주기 때문이다. 우리 집 근처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가로수 은행나무 향이 코끝에 닿는 순간, 엉덩이가 들썩이며 반가움이 몸 밖으로 튀어나온다.
가족들과 일주일에 두어 번 나서는 드라이브는 내게 작은 축제다.
날씨가 좋을 때면 창문을 열어달라는 비밀 신호를 보낸다. 창밖과 집사를 번갈아 보며 간절한 표정을 짓거나, 고개를 낮춰 눈만 위로 올려다본다. 꼬리를 회오리바람처럼 흔들면 거의 틀림없다.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비장의 무기인 ‘콧방울 자국’ 찍기 작전을 쓴다. 유리창에 동그란 자국이 번지면 집사는 결국 웃으며 창문을 내려준다.
하지만 시속 55km를 넘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볼이 얼얼해지고, 찬 공기가 속눈썹 사이로 파고들어 눈을 뜨기조차 힘들다. 사람에겐 안전 속도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이미 폭풍 같은 과속이다. 몸이 뒤로 확 끌려가거나, 엔진음이 높아지고, 배기통에서 힘차게 공기가 뿜어져 나오면 그건 속도가 오르려는 신호다.
그 순간, 나는 한층 간절한 눈빛과 애교를 얹어 집사를 바라본다.
‘속도 낮춰 주때용, 라울이 무쩌버용.’
혀 짧은 애교라도 괜찮다. 그 한 방이면 바람을 즐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돌아온다.
물론 나도 가끔은 눈치 없이 바람을 원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세찬 바람이 부나 창문을 열어달라고 신호를 보낼 때가 있다. 윤 집사는 그럴 때도 미소를 띠며 창문을 열어준다. 마치 “오늘은 한번 제대로 맞아봐” 하고 장난을 치듯. 차가운 비가 털 사이로 스며들고, 물방울이 피부를 톡톡 건드리면 나는 그 감각마저 온전히 즐긴다. ‘꼬질꼬질 라울’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닦아주는 건 집사의 몫이니까.
눈 오는 날의 바람은 또 다르다.
눈송이가 공중에서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다 얼굴에 스치는 그 짧은 순간, 세상은 잠시 고요해진다. 귀 끝에 맺힌 눈이 녹아 한 방울의 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릴 때, 나는 그것마저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날씨가 궂은 날은 그 나름대로, 맑은 날은 또 그 나름대로, 바람을 마주하는 드라이브는 나를 채운다. 혼자 있는 긴 오후엔 종종 공허가 찾아오지만, 가족과 함께 달린 하루는 그 빈자리를 설렘으로 바꿔준다. 창밖을 스쳐가는 빛과 그림자 속에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나답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도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인다.
“볼이 얼얼해도 좋아, 너와 함께 달릴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