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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원망과 환희 사이에 있는 걸까?

감기 걸린 김에 쉬어가는 글로 쓰는 기다림에 대한 단상들

by 반전토끼

기다림은 적당하면 설레지만 길어지면 짜증이 올라오게 하는 양면적인 특성이 있다.

더군다나 내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좋지 않다면 기다리는 것만큼 고역이 없다.


오래간만에 서울에 가서 보고 싶었던 가족, 친구들도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LG골수팬인 내게 한국시리즈 5차전을 볼 수 있는 인생의 기회(?)였다. 비록, 그 암표상 놈들 때문에 예매는 못해서 극장에서 봤지만 말이다. 그때의 기다림은 소풍 가는 학창 시절처럼의 느낌처럼 산뜻하면서도 설렜다.



극장에서 경기를 봐서 그냥 그렇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생각은 완전 경기도 오산이었다. 극장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유광잠바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즐비했고, 심지어 깃발까지 가져오신 분도 봤다. 29년 만에 한국시리즈를 우승할지도 모른다는 큰 설렘과 기대감이 극장에서라도 보겠다는 팬심을 움직인 것 같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빠 손을 잡고 야구를 보러 간 그날부터 LG의 팬이 되었고, 그런 엘린이(엘지 어린인 팬을 지칭)가 30대 후반의 엘른이(엘지 어른인 팬을 지칭)가 될 때까지 우승은 언감생심이었다. 팀의 암흑기 시절에는 "도대체 아빠는 왜 이 팀의 팬이 되어서, 나를 힘들게 하나?"라는 생각까지도 했다. 이처럼 29년의 긴 기다림은 때로는 원망을 낳기도 한다.


엘지의 팬이었던 세월만큼 시간이 흘렀고, 8살 꼬마는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어 경기를 보고 있었다. 객석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LG의 유니폼과 유광잠바를 입고 경기를 보면서 응원하고 있었다. 정말 야구장에 온 것처럼(?) 입으로 응원가 및 구호들을 열정적으로 외치며, 모두가 그렇게 '우승'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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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한국 시리즈를 가고 싶었던 나의 몸부림 (중간) 경기 시작 전 극장 화면 (우) 회장님도 친히 보러오신 경기(Feat. 영화관도 매진시켜버린 팬들)




마침내, LG는 29년 만에 한국 시리즈 우승을 했다.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 한쪽에서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나와 동생 역시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찡함과 환희가 벅차올랐다. 29년 만의 긴 기다림이 환희로 바뀌는 순간, 그 황홀함은 LG팬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29년 만의 LG의 한국 시리즈 우승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너무 잘 놀아서였을까? 집에 오자마자 난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감기몸살에 떨면서 찾아간 병원은 환자들로 그득해서, 앱으로 예약하거나 오픈할 때 가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진료를 볼 수가 없었다.


몸이 천근만근인데 최대 2시간을 기다려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부터 내 안에서 무언가 모를 원망 섞인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속으로 "여기는 병원이 너무 적은 것 같아, 어디서 옮은 걸까.." 등등 온갖 짜증이 가득했었다. 이때의 기다림은 내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병원 순번을 기다리며 근처 빵집에서 아침을 때우며, "똑같은 기다림인데도 내 마음과 상황에 따라 때로는 원망과 짜증, 때로는 설렘과 환희로 느낄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기다림이 있어야 설렘과 환희를 느낄 수 있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KakaoTalk_20231201_100813447.jpg 집 근처 빵집에서의 아침, 이 때는 왜 그렇게 시간이 더딘지.. 너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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