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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Aug 09. 2021

어른을 위한 동화(1)

리아 이야기

어른들에게도 친절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침대맡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어른을 위한 동화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썼다.

이 이야기는 남부러울 것 없이 살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공작부인 리아와 주변인들의 이야기다.

다양한 감정을 일깨워주는 친절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잠들기 전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리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수척한 얼굴로 눈을 떴다. 불과 3개월 전만 하더라도 리아는 기대했다 실망한 적이 없었다.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라기도 전에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졌다. 


나들이를 가려고 드레스를 고르다 비가 오는 바람에 가지 못한 경험. 그것이 ‘실망’이라는 단어를 듣고 리아가 떠올릴 수 있는 최대의 상황이었다. 이제 리아는 더 짙게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매일 아침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가 잠들기 전 깊게 좌절 하기를 반복했다. 


요나스 공작과의 결혼 이후 달빛에서 빛나는 아름다운 성에서 칠 년을 살았다. 그동안 잠시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눈을 뜨면 시녀인 이네트가 세숫물과 드레스를 가져다주었고 남편이 집무를 보는 동안 별채에서 글을 썼다. 때로 그림을 그렸고 마음 내키는 대로 그 글과 그림을 저잣거리에서 팔기도 했다.


수많은 귀족 아가씨들과 부부들이 성에 드나들었고 리아는 모두가 좋았다. 리아가 하는 모든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웃었다. 함께 말을 타고 들판을 달리기도 했다.      


 ‘마리아나.’     


오랜 친구였던 마리아나가 떠올랐다. 마리아나는 남편과 함께 이 성을 자주 찾았지만 이제는 발길을 끊었다. 무려 칠 년 동안 이어져 온 우정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아가씨.”   

  

이네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자 리아는 미소 지었다. 유일하게 남은 과거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곁을 보필해 온 이네트뿐이다.     


“오늘도 창밖만 보실 건가요?”   

  

“누군가 올지도 모르잖아.”     


“아무도 오지 않아요.”     


“넌 너무 부정적이야.”     


“......”     


이네트가 말없이 세숫물과 드레스를 침실 옆 탁자에 두었다. 침실의 큰 창가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는 리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식사는요?”     


“양고기 요리를 먹자. 신선한 샐러드도 함께. 마라아 나가 올지도 모르잖아.”     


“요리를 하던 샬롯이 떠났어요.”  

   

“그럼 누가 요리를 해?”     


“오늘은 제가 하겠죠.”    

 

“요리해본 적 있어?”     


이네트가 살짝 미소 지었다. 다섯 살 아이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봤다.   

  

“물론이죠. 저는 늘 요리를 한답니다.”     


“마리아나에게 서신을 보내 줘. 오늘은 이네트가 요리를 하는 특별한 날이니 꼭 오라고.”   

  

“마리아나 아가씨는 올 수 없어요.”   

  

“넌 너무 부정적이야, 이네트.”     


“제가 부정적이었다면 저 역시 성을 떠났을 거예요.”     


“무슨 말이야? 너도 떠날 거야? 너도 그 사람들 말을 믿는 거야?”     


리아의 표정이 대번에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아가씨는 잘못이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건 아니랍니다.”   

  

“난 행복했어.”   

  

“운이 좋았지요.”  

   

“이네트, 행복에 대한 기대 없이는 행복할 수 없어. 난 늘 기대했는걸.”   

  

“꽃밭에서 꽃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요.”    

 

“넌 기대하지 않아?”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하지 않아요.”    

 

“그게 부정적인 거야.”     


이네트가 핏기 없이 수척해진 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순진무구하고 밝은 리아의 모습은 사라졌다. 간간이 과거에 대한 기억이 리아를 끊임없이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리아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해가 뜨고 지듯 당연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사막 한가운데에선 어떤 선명한 색깔 하나를 기대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리아는 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리아 아가씨는 어쩜 저렇게 순수하실까.’

 ‘원하는 걸 다 가지면 사람은 순수하고 아름다운가 봐.’     


모든 사람들이 순진무구하고 순수한 리아를 칭송했다. 이네트 역시 리아를 동경했다. 때로 리아와 자신의 처지를 뒤바꾸어 상상해 보기도 했다. 알지도 못한 사이 피어오르는 묘한 마음을 느낄 때면 자신을 탓하며 더욱 리아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뼛속까지 충실한 하녀가 되기 위해 노력해 온 덕에 지금까지도 리아의 곁에 남을 수 있었다.      


리아는 짙은 분홍빛의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이 드레스를 입고 왕궁에서 열린 무도회에 갔던 날, 남편인 요나스 공작이 체포됐다. 감히 왕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글과 그림을 퍼뜨렸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리아는 하얗게 질린 채로 왕의 앞에 무릎 꿇었다.     


“폐하, 요나스를 아시지 않습니까. 제 남편은 선조 때부터 왕국에 충성해 온 충신입니다. 부디 사안을 다시 조사해 주십시오.”     


“이미 네 남편이 모든 죄목을 인정했다.”  

   

리아는 남편을 쳐다봤다.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요나스는 리아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떨군 채 굳게 입술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믿을 수 없어요. 도대체 그 글과 그림이 무엇인지 보여주세요. 요나스는 예술을 사랑하지만 직접 창작한 적이 없어요. 도대체 어떤 것인가요? 어떤 것이기에 아내인 나조차 본 적이 없나요?”   

  

왕이 리아의 앞에 얇고 빛바랜 종이 무더기를 던졌다. 리아는 새로 장만한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채 그림과 글을 살펴보았다. 리아의 눈과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은 모두 리아의 것이었다. 새벽녘, 어떤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요나스의 곁에서 만들어 가던 이야기들. 자유롭게 지내는 어느 산속 소녀의 이야기였다.      


“이, 이건...”     


리아가 요나스를 바라봤다. 요나스가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리아에게 말했다. 제발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숲의 요정 같은 아름다운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모든 질서는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마음껏 악행을 저지르라고 성에 갇힌 귀족과 왕족들은 바보라고 가르치더군.”


“남편과 둘이 이야기하게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러나 그날을 마지막으로, 요나스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리아에게 남은 것은 요나스가 사정해서 남겨둔 성뿐이었다. 요나스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 죽어 어느 길가에 버려졌다. 그 길에 찾아가 요나스의 시신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이네트에게 부탁했다. 리아가 본 것은 요나스의 무덤뿐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초라한 무덤.     


무수한 생각들이 리아의 머리를 스쳐 지났다. 이네트가 부르지 않았다면 해가 저물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아가씨, 저녁 드세요.”  

   

“이리 가져다줘.”   

  

“나와서 드세요.”     


“혼자 그 넓은 식당에서 먹고 싶지 않아.” 

    

이네트는 가만히 리아를 바라보다 일 인분의 식사를 차려 리아에게 가져다주었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시든 채소로 어떻게든 멋을 낸 샐러드와 감자 세 알, 최대한 얇게 썰어 양을 많아 보이게 한 양고기를 뒤적이던 리아가 이네트를 쳐다봤다.     


“무슨 말이야?”     


“이제 더 이상 식량이 없어요.”     


“감자도?”     


“네. 감자도 없어요.”     


“내일부터 그럼 뭘 먹고살아? 포도주를 먹고살아야 하나.”   

  

피식 웃는 리아를 보며 이네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 성의 물건들을 파셔야 해요.”  

   

“안 돼!”    

 

“그럼 제게 품삯은 어떻게 주실 생각이세요?”   

  

“네 품삯?”     


리아는 낯선 사람인 것처럼 이네트를 쳐다봤다.     


“그게 왜 필요해? 나랑 이 성에 살면 되지. 둘이 살자! 우리 둘이 살면 될 거야.”     


이네트가 천천히 리아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제게도 가정이 있어요. 저와 남편인 로버트가 먹여 살려야 할 세 명의 아이가 있지요.”    

 

“잠시 내게 있어 줘야 한다고 해. 네 아이는 로버트가 잠시만 보살피면 되잖아. 나도 네겐 가족이잖아.”   

  

간절한 리아의 표정에도 이네트는 담담했다.      


“제가 품삯을 받지 않으면 아이 중 하나는 학교를 다닐 수 없답니다. 다섯 식구의 옷을 만들 사람도 없고, 청소를 살뜰히 해낼 사람도 없지요.”     


“그럼 모두 이 성에 데려와. 이 성에서 살자.”    

 

“그럼 로버트의 품삯 만으로 이 성에서 여섯이 살자는 말씀이신가요?”     


리아는 잠시 말없이 이네트를 쳐다봤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헤어져 본 적이 없는 이네트였지만 정작 리아는 이네트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네트는 아침에 눈 뜨면 자신에게 세숫물과 드레스를 가져다주고 필요한 보필을 해주는 시녀이자 믿을 수 있는 친우였지만 정작 그녀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생활을 이네트가 다 아니 그것으로 이네트는 만족할 줄 알았다.     


“너도 떠날 거지?”    

 

“그럴 수밖에요.”     


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처음으로 침대 밖을 나와 이네트를 끌어안았다.     


“난 잘못한 게 없다고 했잖아. 왜 모두 날 떠나는 거야?”     


흐느끼는 리아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이네트가 말했다.      


“떠나는 건 버리는 것과는 달라요.”   

  

“거짓말이야. 돌아오지 않을 거잖아.”   

  

“아가씨만 비참하지 않다면 언제든 저희 집에 오셔도 좋아요. 그러니 떠나지만 떠난 것이 아니지요.” 

    

“네가 더 이상 날 위해 일하지 않을 거잖아.”  

   

“저는 아가씨를 사랑했지만 언제나 저와 아이들을 위해 일했는걸요.” 

    

“넌 이 성에서 즐겁지 않았어? 난 너와 있어서 즐거웠는걸.”     


“그렇다면 저희 집에서도 즐거우실 거예요.”     


리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가씨는 제게 비할 곳 없이 아름답고 잔인하고 찬란했어요.”  

   

“내게 네게 잔인했어?”     


“정말 잔인하기만 했다면 제가 이리 슬프지도 않을 거예요.”     


이네트가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앞치마를 벗어 리아에게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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