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나 이야기
마리아나는 남편인 타메르 공작이 주최하는 연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격식 있는 자리에 어울리는 우아한 작약을 꺾어 테이블을 장식할 예정이었다.
작약은 리아가 좋아하는 꽃이기도 했다. 사실 애초에 리아의 정원에 핀 작약이 너무 아름다워 따라 심은 거였지만.
사람들이 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수군거렸다. 누군가는 안쓰럽다고 했고 누군가는 자업자득이 아니겠냐고 했다. 사람들은 마리아나를 걱정했다. 리아와 늘 붙어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아나는 최대한 적절한 반응을 했다. 친우를 잃었다는 슬픔에 과하게 빠져 그녀의 남편이 저지른 죄목이 반역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너무 경박스럽긴 했지. 하여튼 튀어서 좋을 게 없어.’
남편인 타메르 공작은 고기를 썰어 입에 넣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마리아나 역시 남편의 말에 맞장구쳤다. 마리아나의 삶은 놀랍도록 평안했고 리아의 삶이 망가진 이후 이 평온한 삶을 지켜야 한다는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마님, 드레스는 어떤 것으로 입으시겠어요?”
“수수한 것으로. 최대한 튀지 않게 살짝 옅은 색이 좋겠어.”
“알겠습니다.”
하녀가 나가고 나서 마리아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지막으로 봤던 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췌하고 절박하던 모습.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리아의 모습이었다. 마리아나에게 그녀는 언제나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리아의 방에서 숲 속 소녀 이야기를 처음 읽었던 날이 떠올랐다.
“리아, 이 숲 속의 아이는 요정이야?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럽지?”
“요정? 난 그냥 어떤 자유로운 아이를 상상하고 만든 이야기인걸.”
“하지만 아무도 지켜주는 사람이 없는 아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 사냥꾼이 쏜 총에 맞게 될지도 모르고 겨울의 추위를 품어줄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
“이 아이는 혼자 다 하는 걸?”
“게다가 이 아이는 여자잖아. 혼자 살기엔 너무 위험해.”
마리아나의 말에 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 이건 그냥 내가 만든 이야기일 뿐이야. 왜 그렇게 이 아이를 걱정하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 이야기의 행복을 알 수 없을걸?”
“도대체 어떤 부분이 행복이라는 거야?”
“이 아이는 말이야, 그래. 원래 귀족 아가씨라고 해두자. 하지만 혼자서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아가씨야. 그래서 숲 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아. 동물들이 이 아가씨를 좋아하거든. 마음껏 입고 싶은 옷을 입을 거고 때로 말을 타고 숲을 달릴 거야.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출 거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거야. 마음껏 말이야. 어때?”
“리아, 혼자 있는 사람이 마음껏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도대체 누가 알아줘?”
“얜 누가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걸?”
“그렇담 이 아가씨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야. 사실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러워하길 바랄걸.”
“아니야. 사람들이 자기를 부러워하지 않아서 행복해하는 중이야.”
“어째서?”
“그래야 진짜 원하는 걸 할 수 있거든.”
“그렇게 살면 원하는 걸 가질 기회조차 없을걸?”
“너와는 원하는 게 다를 수 있지.”
“리아, 이 소녀는 가져보지 못한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거야.”
“자기가 원하는 걸 모른다고?”
마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가졌던 것이 사실 모두가 원했던 거라는 걸 알게 된 후, 이 아가씨의 삶은 어떻게 될까?”
리아가 여전히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마리아나를 바라봤다.
“마리아나, 내 이야기에서 그런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아.”
“넌 모르는 거야, 사실.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왜 알아야 해? 짐작할 수 있는걸.”
마리아나가 살짝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야. 네가 그런 걸 상상조차 못 해서 말이야.”
리아는 다시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마리아나는 건성으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만일 내가 공작부인이 되지 않았다면. 타메르 대신 다른 사내를 택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마리아나는 로르 투아 후작의 첫째 딸이었다. 딸이 열 살이 될 무렵, 후작은 온갖 상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했고 왕국의 이름난 가문을 기웃거리며 작위를 높일 기회를 찾았다. 그러다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이 혼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나는 공작부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공작부인 외의 다른 길은 상상조차 해 볼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린다면, 자신이 누리는 안락한 생활마저 포기할 각오를 해야 했다. 마리아나는 자신이 누리는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지 않았고 모든 것을 잃은 삶은 두렵고 막막하기만 했기에 로르 투아 후작의 뜻에 따라 혼인을 했다.
타메르 공작은 좋은 남편이었다. 공무와 부의 축적, 가문의 명성이 최고의 가치인 그는 여색을 탐하지도 술에 탐닉하지도 않았다. 리아와 친해지게 된 이유도 남편인 타메르 때문이었다. 요나스 공작이 덕망이 높고 신임을 받으니 마리아나도 리아와 교류하며 자신을 도왔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후작가의 여식인 마리아나를 사교계의 공작부인들이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 없었다. 누구도 쉽사리 손을 내밀어 주지 않을 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쑥 손을 내밀어 준 것이 리아였다. 듣던 대로 요나스 공작 부부는 빛났다. 그들의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마리아나는 리아 덕분에 함께 빛날 수 있었다.
“마리아나, 언젠가 나는 요나스와 단둘이 멀리 여행을 떠날 거야.”
“요나스 공작님은 매일 바쁘시잖아. 어떻게 그 모든 일을 버리고 떠날 수 있어?”
“아냐, 남편은 매일 나랑 약속하는걸. 늘 되뇌지 않으면 정말로 멀어져 버리니까 우린 매일 약속을 해.”
마리아나는 많은 대화를 나누는 리아 부부를 동경했다. 타메르는 좋은 남자였지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그의 말과 행동으로 유추해 내야만 했다.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면 여기 남겨진 것들은 어쩌려고 그래.”
“어차피 돌아올 건데 뭘.”
“기약 없이 떠나는 건 좋지 않아. 남은 사람들이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하잖아.”
“어차피 그 사람들은 나를 곧 잊고 자기 삶을 살 텐데.”
“그렇게 쉽게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하지만 마리아나, 그건 내 몫이 아니야. 나도 이곳에 남겨진 사람들이 그리울 거야. 난 내 몫의 그리움만 감당하면 되는걸.”
‘내가 남겨지잖아.’
마리아나는 차마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했다. 리아에게는 모든 것들이 공평하게 소중해 보였고 언제나 훌쩍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마리아나는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했고 머물고 싶었다. 리아가 써 내려간 ‘숲 속 소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마리아나는 진심으로 그 소녀의 삶을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정해진 곳을 떠나려는 거야. 어째서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거야. 난 모든 것이 필요하고 모두와 함께하고 싶은데. 어째서 넌 아닌 거지?
리아와 함께 있을 때면 모든 것이 뒤흔들렸고 찰나의 즐거움 뒤로는 불안이 밀려들었다. 순수하게 사랑하는 친우로 자신을 대하는 리아에게서 애정보단 애증을 느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마리아나는 리아의 옆에 머물러야 했고 그 누구보다 마음을 감추는 것에 능했다.
“당신 내 말 들었어?”
“네?”
리아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남편의 말을 놓친 마리아나가 타메르의 눈을 쳐다봤다. 타메라의 눈동자가 엄하게 마리아나를 쳐다봤다. 그는 언제나 화내지 않고 눈빛으로 꾸짖었다.
“리아 때문에 심란한 건 알지만 오늘 모신 분들 모두 중요한 분들이라고. 리아 말고 다른 공작부인들과 더 교류해야 당신 명예가 회복될 거야.”
‘난 애초에 명예가 없었는걸요.’
마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삼켰다. 마리아나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아무리 뒤덮으려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사교계의 율법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는 것을 모두 말하는 것은 좋은 공작부인의 덕목이 아니니까.
곧 손님들이 들이닥쳤고 마리아나는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리아는 늘 꼿꼿한 자세로 매섭게 주변을 둘러보는 아그네스 공작부인을 싫어했었다. 그 노부인은 해야 할 것보단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더 많았고 젊은 공작부인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리아는 아그네스 공작부인을 흉내 내며 그녀의 모든 설교를 무시했었다. 하지만 마리아나는 눈앞의 아그네스 공작부인을 깍듯하게 모셨다.
아그네스 공작부인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마리아나를 훑어보았다.
“요나스 공작부인의 성이 텅 비었다더군요.”
“그런가요. 소식을 듣지 못하니 알 길이 없었어요.”
“도둑이 들어 성의 값진 것들을 다 훔쳐가는 바람에 공작부인이 내쫓기듯 나간 것이지요.”
마리아나는 마지막으로 봤던 초췌한 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정말 먼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을까.
“어차피 혼자서는 그 큰 성에 사는 것이 힘들었을 거예요.”
“친우가 걱정되지 않으신가 보군요.”
“그럴 리가요. 리아가 걱정되지만 저는 제 남편의 이름에 작은 흠집도 내길 바라지 않는답니다.”
아그네스 공작부인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와 얘기지만 리아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모두의 사랑을 받았는지 신기할 지경이지요.”
아그네스의 말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아그네스가 말을 이었다.
“사람이 분수에 과한 것을 자기 것인 양 살다 보면 결국은 무너지게 된답니다.”
마치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는 영애 시절로 돌아간 듯, 공작부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는 보셨겠죠, 그 그림들을.”
아그네스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마리아나를 향했다.
“보았습니다.”
“정말 헐벗은 여자아이의 그림인가요? 그 아이는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지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게도 온전히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요.”
“그 앳된 얼굴로 부정한 이야기를 쓰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부인도 충격이 크셨겠어요.”
누군가가 한 말에 여기저기서 마리아나에 대한 동정 어린 말들이 쏟아졌다. 마리아나는 묵묵히 그것을 견뎠다.
“공작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한 번도 누릴 수 없었을 것들을 누렸는데 다른 것을 꿈꾸다니. 어리석은 일이지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 충실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아그네스의 말에 다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위치에 머물 자격을 얻은 것처럼 모두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나저나, 소식은 아직인가요? 타메르 공작도 혼인을 한 지 꽤 되었으니 이제 후세를 생각할 때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요.”
마리아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인이 된 심정으로 아그네스의 눈빛을 견뎠다. 타메르는 한 번도 자신을 탓한 적이 없었지만 마리아나는 알고 있었다. 타메르의 눈빛이 늘 엄하게 자신을 꾸짖고 있다는 것을.
“노력 중이에요.”
“그러고 보니 요나스 공작 부부도 아이가 없었지요. 그 부인에게 물든 것은 아니겠지요?”
마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리아는 마리아나가 아이 때문에 조급해할 때마다 말했다. 원하는 것을 조금 천천히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고. 하지만 그때마다 마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만 있으면 완벽해지는 상황을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그리고 곧장 의문이 뒤따랐다.
‘리아는 아이가 없는데 어째서 완벽하지?’
마리아나는 스스로 그 답을 찾았다. 리아는 간절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늘 간절하게 머물 자리를 향해 살아온 마리아나는 리아의 말에서 위로를 얻을 수 없었다.
정말 떠나버린 것일까. 언젠가 요나스와 함께 가려던 그 먼 곳으로의 여행을 지금 가버린 걸까. 리아는 어디 있을까.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요나스 공작부인은 어쩌면 사창가에 팔려가거나 구걸을 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마리아나는 누군가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맞아요, 그래도 인물이 반반하니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지요.”
겪어 보지 않은 누군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 마리아나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 겪어 보지 못한 삶은 두려움이었고 지금은 그저 확실한 타메르 공작부인으로서의 자리를 지킬 때라 판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