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네트 이야기
이네트의 집은 작고 아담했다. 대문을 두드리자 현관으로 다가오는 이네트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이네트가 리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네트, 난 더 이상 그 성에 살 수 없어...”
“들어오세요, 아가씨.”
리아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네트가 리아의 등을 다독였다.
“아가씨가 정말 이곳에 올 줄 몰랐어요.”
“갈 곳이 여기뿐이었어.”
“뭘 좀 드셨어요?”
“샬롯이 어젯밤 음식을 들고 찾아왔어. 어젯밤 먹은 게 다야.”
“샬롯이요?”
“응. 그리고 성안의 값비싼 것들을 모조리 훔쳐갔지.”
“세상에!”
“괜찮아, 이네트. 만일 샬롯이 아니었다면 난 오늘도 내 방에서 오지 않을 사람들만 기다렸을 거야.”
“아가씨...”
“마리아나도 찾아왔어. 내게 사람들은 더 이상 날 찾아오지 않을 테니 죄인답게 굴라고 말했어.”
“아가씨는 죄를 짓지 않았는걸요.”
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네트, 내 남편이 죽은 순간 그건 이미 소용없는 진실이 되어버렸어. 사람들은 아름다운 귀족 부인인 나를 좋아했지만 모든 것을 잃은 나를 품어줄 이유는 없는 거야.”
리아의 몰골을 초췌했지만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담담했다. 늘 들뜬 태도로 살아오던 리아에게 이런 차분함은 본인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이네트, 내가 살 집을 구할 때까지 여기서 잠을 자도 될까?”
“아가씨 이곳은 너무 누추한걸요.”
“다락방이라도 좋아. 대신 너의 세 아이들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칠게.”
이네트는 남편인 로버트가 일하러 나간 사이 부지런히 집을 청소하고 빵을 구웠다.
아이들을 먹인 후 첫째 바루크스를 아카데미에 보내야 했다.
둘째와 셋째는 돈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할 처지였는데 그나마 리아가 있으니 가정교육을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세 아이들이 리아와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기를 바랐다. 리아는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 할 테니.
“리아 아가씨.”
“응?”
“디아리아에게 언젠가 배를 타고 함께 여행을 가자 하셨다 들었어요.”
“맞아. 디아리아가 용과 전사들이 있고 여자들이 검술을 배우는 나라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대. 나도 그곳을 알아. 바다 건너 있는 사막의 나라야.”
“검술은 이곳에서도 배울 수 있어요.”
“디아리아에게 검술을 가르치려고 여행을 가자는 게 아니야. 난 디아리아가 꿈을 갖고 자라길 바라는 거야.”
“디아리아는 저와 함께 이곳에 남아야 해요. 아홉 살은 뭐든 꿈꿀 수 있지만 저는 그 꿈의 적절한 선을 알려줄 의무가 있답니다.”
“내가 잘못한 거야?”
이네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가씨는 몰랐을 뿐이에요.”
“하지만 나는 디아리아에게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아가씨는 아직 모르는 거예요.”
“내가 도대체 뭘 모른다는 거야?”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아는 게 언젠가 제 딸을 더 힘들게 할 거예요.”
“글세. 그건 디아리아가 스스로 결정할 거야.”
“아뇨. 그때를 기다리다 디아리아는 삶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지 몰라요, 아가씨.”
리아는 이네트의 단호한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어쩌면 이네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건방진 생각이었다.
디아리아와 함께 여행을 가다니. 이런 말은 공작부인일 때에나 유효한 말일 텐데.
“미안해.”
“무지는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아가씨. 다만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아가씨는 이 삶을 이해해야 해요. 아가씨가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해요.”
“노력할게.”
이네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빨래를 널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리아가 살던 성에 비하면 이네트가 사는 집은 작고 초라했다. 다락에서 지내는 리아가 신경이 쓰였지만 생각보다 리아는 빠르게 적응했다.
자신이 리아였다면 절대 이 집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어째서 리아는 저리도 온전히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매일 귀족 부인들을 동경하며 별 중요치 않은 자질구레한 일을 해 온 이네트는 리아를 보며 알게 되었다. 자신이 한 번도 삶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것을.
결정하기보다 떠밀려 온 것들이 많았다. 적응하기도 전에 많은 것들이 이네트의 삶에 밀어닥쳤고 하루하루 눈앞의 것들을 해내는 것이 이네트가 생각하는 인생이었다.
“이네트.”
“응?”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않아요.”
“넌 매일 생각 속에 갇혀 있는걸.”
“해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요.”
“해야 할 것들은 그냥 하면 되잖아.”
“그것들로 책임져야 할 것들이 있어요.”
“너의 세 아이들을 말하는 거야?”
“물론이죠.”
“그렇지만 그건 네가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거잖아. 어째서 늘 걱정하는 거야?”
“사랑하니까요.”
“아이들은 언젠가 널 떠날 거야, 이네트. 그들과 함께 있는 순간을 그냥 즐기면 되지.”
“그들이 자기 몫을 못 해내면 어떡할까요. 사고가 난다면.”
리아가 이네트의 손을 잡았다.
“그들의 몫이야. 네 것이 아니야.”
“제가 낳았는걸요.”
“이네트. 아까 네가 내게 했던 말이 맞아. 무지는 죄가 아니야.”
이네트가 살짝 미소 지었다.
“아가씨는 알지 못할 거예요.”
“맞아. 난 네가 아니니 알 수 없어. 아이도 낳아보지 않았으니 더더욱. 하지만 이네트, 네 아이들은 용감해. 적어도 자기 삶을 감당할 정도로. 내가 본 숱한 귀족 영애들보다 훌륭해.”
“타고난 마음은 삶을 견디게 해 주겠지요. 그렇지만 삶의 어떤 부분도 보장해 주지 않는답니다.”
“어째서 매번 최악을 걱정하는 거야?”
“실망은 사람을 무너뜨려요.”
“모든 사람은 실망하며 살아. 하지만 모두가 무너지지는 않는걸.”
“아가씨는 대단해요. 마음과 환경을 모두 타고났어요. 제 아이들은 그렇지 못해요.”
“맞아. 하지만 내게도 불행이 닥쳤고 난 속수무책이었어. 네 아이들도 마찬가지야. 모든 것을 네가 알려줄 수 없고 막아줄 수 없어.”
“다른 삶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예상 가능한 시련을 겪겠지요.”
“그걸 바라는 거야? 그게 네가 얘기하는 현실적이라는 거야?”
“아가씨에게는 최악이겠지요. 예상 가능한 불행을 품고 사는 삶이라니.”
“내가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삶이라는 게 그런 거야?”
“맞아요. 이제 그런 삶을 이해해야 해요.”
“아니, 이네트. 난 억지로 이해하진 않을 거야. 필요하다면 겪을게. 그럼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