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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Aug 13. 2021

어른을 위한 동화(5)

샬롯 이야기

샬롯은 눈을 뜨자마자 금전이 든 보따리를 확인했다. 리아의 집에서 가져온 귀한 물건 대다수는 팔아서 금전으로 가지고 있었다. 같이 살고 있는 로베르트 조차 알지 못하는 돈이었다.


 함께 살고 있지만 샬롯은 로베르트를 믿지 않았다. 그저 외로운 순간 옆에 있을 누군가가 필요할 뿐, 샬롯에게 남자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리아가 좋아했던 하얀 작약이 탁자 위에 놓여있다. 천천히 꽃 가까이 다가가 향을 맡은 후 부지런히 요리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삶을 살게 된 것이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일터로 가지 않고 자기만을 위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삶을 동경해 온 샬롯은 그 꿈이 현실이 될 거라고 믿지 않았다. 남겨진 리아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절대 눈앞에 굴러들어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샬롯은 자신이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쁜 누군가가 했을 일을 미리 한 것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샬롯, 오늘 아침은 뭐야?”    

 

로베르트가 샬롯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살구잼과 빵. 그리고 양송이 수프.”     


“좋은데?”     


로베르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탁에 앉았다. 샬롯은 로베르트에게 어젯밤 어디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고 다시 떠나버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약간의 기대조차 상처가 된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샬롯, 우리 어디론가 떠날까? 여행이라도 말이야.”     


샬롯은 고개를 저었다.   

  

“할 일이 있어.”     


“무슨 할 일? 이제 일 안 해도 먹고살 수 있는데 말이야.”

    

“아무튼 여행은 별로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원한다면 혼자 다녀와.”     


“생각 좀 해 보고.”     


사내들은 단순하다. 샬롯은 지금까지 잠시나마 자신의 곁에 머물렀던 사내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다정할 때는 잘못을 저지른 후였고 죄책감을 씻기 위해 샬롯이 평소에 듣고 싶어 하던 말을 해 주었다. 로베르트는 그 사내들 중에서도 가장 단순한 사람이었고 샬롯이 머리 쓸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파악하기 쉬웠다.     


샬롯과 혼인식을 한 이후, 밖으로 나돌며 술과 여자에 탐닉하던 로베르트를 다시 받아준 이유도 머리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트는 샬롯이 자신을 다시 집에 들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자신을 용서했다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남편 행세를 했다. 샬롯이 자신이 없는 사이 수많은 경험을 거치고 남자들을 만나며 강해졌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봐 샬롯, 지금처럼 당신이 여유롭고 넉넉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말이야 난 애초에 당신 곁을 떠나지도 않았을 거야.”     


로베르트를 보며 샬롯이 살짝 미소 지었다. 어리석고 안쓰러운 로베르트.    

  

“난 여유롭고 넉넉해진 게 아니야, 로베르트.”     


“예전엔 내가 밤에 술만 마셔도 난리를 치고 집착했잖아.”     


“그건 당신이 혼인식을 한 이후부터 변해버렸기 때문이지. 난 적응하지 못했고 비참했을 뿐이야.” 

    

“당신 기대가 큰 거였지. 사실 샬롯, 당신은 언제나 나를 하찮게 봤잖아. 그걸 내가 못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지금 가장 하찮게 보는걸, 로베르트.’     


샬롯은 말없이 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다.   

  

“난 당신을 하찮게 보지 않았어. 혼인 생활에 대한 기대가 컸을 뿐이야.”     


“여자들 대부분이 기대를 품는다더군. 하지만 그 기대대로 사는 사람은 없어.”     


“있었어.”    

 

“누구?”     


“리아 아가씨.”     


“그래서 그 잘나신 아가씨께서 지금 어떻게 되었지, 샬롯? 결국 이긴 건 너야. 넌 그 귀족 아가씨의 돈과 보석을 가졌잖아. 게다가 남편까지 살아있고 말이야.”     


샬롯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빵을 베어 물었다. 이제 돈도 가진 마당에 더 이상 이 사내와 같이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래, 네 덕에 난 온갖 산전수전을 겪었어. 네 말대로 기대가 커서 눈물도 많았지. 사람들은 나를 버림받은 아내라고 손가락질했고 나는 그 시선을 버티며 혼자 살아남았어. 로베르트. 아쉽지만 리아 아가씨와 돈과 보석을 가진 건 나여야 해. 너와 나눌 수 없어.’    

 

“가장 행복한 기대를 품은 순간 모든 게 사라지는 기분이 뭔지 알아?”

     

“지금 그 아가씨한테 죄책감 느끼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그 여자는 이미 많은 걸 누렸다고.”     


“난 알아, 로베르트. 그건 외로움이야.”     


“절망이겠지.”  

   

“사라진 그것에 애정이 있다면, 외로울 수밖에 없어. 그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을 걸 알아서 절망하는 거야.”     

“그렇다고 해 두자.”     


로베르트가 대화에 흥미를 잃은 듯 수프에 빵을 찍어 먹었다.   

   

“로베르트, 친구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녀와. 그동안 내 할 일을 마무리할 테니 그 후에 같이 여행 가자.” 

    

“좋아.”    

 

샬롯은 로베르트가 여행을 간 후 가져갈 자신의 짐을 떠올려 보았다. 작은 보따리 하나면 된다. 


어느 시골 마을에 작물을 기르며 새 삶을 시작하기 부족함이 없다. 느긋하게 로베르트를 바라봤다. 

이 사내가 이토록 초라해 보인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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