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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Aug 22. 2021

어른을 위한 동화(7)

리아 이야기


리아는 그림을 그렸고 밤이 되면 글을 썼다. 과거에 대한 생각들이 자꾸만 떠올라 머릿속이 늘 소란했다. 가장 힘들 때는 막 눈을 뜬 이른 아침이었다. 한때 리아는 이른 아침의 몽롱한 기분을 즐겼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성이 깨어나기도 전인 그때, 자신이 버리고 잃은 모든 것들이 떠올랐고 곁을 떠난 사람들이 그리웠다.

성에 살 때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 눈물이 흐르기 전, 몸을 일으키는 법을 익혔다.

   

리아는 지금까지 그린 그림을 가지고 장터로 나섰다. 한 달 남짓, 아네트의 집에 머무르며 신세를 졌으니 이제 떠날 준비도 해야 했다. 언제까지 아네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장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상인들이 리아를 힐끔거렸다. 아름답고 단정한 차림으로 나타난 리아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리아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바닥에 깐 천 위에 그림을 올려두었다.    


“뭘 팔러 온 거죠?”   

 

꽃을 팔러 온 여자가 물었다. 짙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리아를 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빠르게 리아를 훑었다.    


“그림이요.”    


“그림이요? 어디 봐요.”    


여자가 리아의 그림을 보고는 씩 웃었다.    


“꽤나 좋은 솜씨군요.”    


“고마워요.”    


“하지만 여기선 팔리지 않을 거예요.”    


“왜요?”    


“입은 옷을 보니 나 같은 평민은 아닌듯하군요. 그러니 이리 물정을 모르겠지요.”    


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정을 모른다는 말은 요나스가 죽은 이후 계속해서 들어온 말이었다. 상황과 단어가 달랐을 뿐, 이네트도 마리아나도 리아에게 물정을 모른다는 말을 했다.    


“물정을 모르니 알아가려고 여기 온 거예요.”    


“굳이 뭐하러 알려고 해요? 모르고 살아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데.”    


꽃을 팔던 여자가 가만히 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혹시... 죄를 지어 처형당한 공작의 살아남은 부인인가요?”    


리아가 흠칫 놀라 고개를 숙였다.    


“맞군요? 한 달 전 어디론가 사라졌다더니!”    


“모른 척해줘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부인이 올리브빛 눈동자를 지닌 엄청난 미인이라더니 정말이군요.”    


“제발 모른 척해줘요. 난 돈을 벌어야 해요.”  

  

여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하는 눈빛에 리아는 예전에 함께 시간을 보냈던 영애들을 떠올렸다.    


“이봐요. 잊히고 싶다면 애초에 이런 차림으로 와서는 안돼요. 눈에 띄고 싶지 않다면서 이런 귀한 옷감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오다니.”    


“난 그저 그림을 팔러 왔을 뿐이에요. 내가 어떤 옷을 입든 그림만 팔면 되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팔아봐요, 한 번. 그리고 일주일 후, 장터에 다시 와요. 아마 내가 한 말이 머릿속에 남아 지금과는 다른 옷을 입고 오겠죠.”    


“그럴지도 모르죠. 아닐지도 모르고.”    


리아는 짙은 흑발의 여자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 속의 마녀처럼 여자는 당돌하고도 매서운 눈빛으로 리아의 모든 것을 캐내려 했다.    


“나랑 내기할래요? 나는 오늘 당신이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은요?”    


“내기하고 싶지 않아요.”    


리아는 자리를 옮기기 위해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여자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왜 날 두려워해요?”  

  

“두려워하는 게 아니에요. 방해받고 싶지 않을 뿐이죠.”    


“방해받고 싶지 않다면서 어째서 그렇게 다르게 행동하죠? 이 장터를 좀 봐요. 도대체 누가 이런 삽화 같은 그림을 팔고 누가 이렇게 고운 빛깔의 드레스를 입고 있나요?”    


“그건 원래 내 모습인걸요.”    


“그렇다면 부인,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건 욕심이군요.”    


“나도 이곳에서 물건을 팔아 돈을 벌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왜 욕심이죠?”  

  

“그럴 수 있어요. 다만 각오해야 할 거예요.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이 당연히 나타날 테고 당신은 방해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    


“내게 왜 이리 무례하죠?”    


“부인, 이것이 이곳의 대화법이랍니다. 돈을 벌고 싶다면 익숙해져야 해요. 부인이 여기서 사람들 틈에 끼어 보통사람 행세를 할 권리가 있듯 이곳 사람들도 새로 온 장사꾼이 어떤 사람인지 알 권리가 있지요.”

   

“실례지만 자리를 옮기겠어요.”    


“그럼요. 당신답군요. 당신은 누군가가 당신을 환영해줄 때까지 자리를 옮기겠지요.”    


“난 환영을 바라지 않아요. 조용히 그림을 팔고 싶을 뿐이에요.”    


“부인, 자신을 속이지 말아요. 이곳에 그림을 팔러 왔을 때, 일말의 기대를 하지 않았나요? 누군가가 내 그림을 칭송하기를, 이곳 사람들이 성에서 나를 보듯 나에게 친절하기를.”   

 

“그런 상상은 누구나 하지 않나요? 하루가 잘 풀리기를 상상하는 건 당연해요.”    


“오, 아뇨. 하루가 잘 풀리기를 상상하는 것은 그런 망상과는 다르답니다. 전 이곳에서 꽃을 판 지 십 년이 넘었지요. 장터에 나오기 전, 오늘은 꽃이 시들기 전에 다 팔리기를, 맘씨 좋은 귀족 영애가 꽃을 한꺼번에 사주기를 기대한답니다. 때로 그 기대가 그대로 이루어지곤 해요. 부인께서 하는 상상은 마치 제가 이곳에서 어떤 잘생긴 귀족 청년이 내게 첫눈에 반해 날 성으로 데려가 주길 기대하는 것과 같은걸요.”    


리아의 마음속에서 울컥 붉은 무언가가 치솟는 것 같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난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제발 날 내버려 둬요!”    


“오, 부인. 이리 쉽게 눈물을 보이시다니요. 나쁜 뜻은 없었어요. 그냥 현실을 알려드린 것뿐이랍니다.”

   

여자가 바구니에서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었다.     


“내 이름은 플레아 로즈입니다. 부인께서도 아시겠지요. ‘로즈’는 이곳에서 고아를 뜻하는 성이라는 것을요.”    

리아는 장미를 받아 들고 눈물을 닦았다.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팔 년 전, 이곳에서 꽃을 팔던 날 부인께서 제 꽃을 모두 사주셨지요. 가엾어라. 내가 장사를 일찍 끝내 줄 테니 얼른 동무들과 어울리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기도가 먹혀든 것만 같아서 기뻤지요.”     


리아가 기억을 더듬다 한 소녀를 기억해 냈다. 눈앞의 여인과 똑같은 흑안의 소녀.    


“기억나요. 요나스와 함께였지요.”  

  

“부인, 저는 그때도 이곳에 있었답니다. 부인을 만나고 팔 년 동안 제 자리는 변하지 않았지요. 이곳에서 그림을 팔고 싶다면 제 도움을 받으세요. 어떻게 자리를 지키는지 알려드리지요.”   

 

“당신은 날 싫어하잖아요. 어떻게 그 도움을 받겠어요?”    


“싫어하지 않아요. 다만 너무 다르니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지요.”  

  

“이해받을 생각 없어요.”    


“그랬다면 당신은 이미 자리를 떴겠지요. 아마 당신은 다음에도 이 자리에 오겠지요. 그나마 익숙한 곳이니까. 이제 그림을 팔아봐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 난 꽃을 팔게요.”    


리아는 애써 여자를 못 본 척하며 그림을 올려두었다. 몇몇 사람들이 리아를 힐끔거렸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리아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플레아의 말이 맞았다.

리아는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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