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 이야기
플레아의 집은 이국적이고 정갈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가구들이 조화를 이루었고 화려한 동시에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집이 당신을 닮았군요.”
“그런가요?”
“하인은 없나요? 혼자 관리하기에는 넓은 집인데요.”
“심부름을 하는 아이는 있지만 하인은 따로 두지 않아요. 전 모든 걸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하답니다.”
“대단하군요. 그 많은 일을 혼자 다 하다니.”
“부인의 삶이 조금 특별했던 거지요.”
리아는 천천히 플레아의 집을 둘러보았다.
“멋져요. 이 넓은 집을 관리하다니.”
“당신도 할 수 있어요. 해 볼 필요가 없었을 뿐이죠.”
플레아가 리아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어 주었다.
“정원에서 키운 허브로 만든 차예요.”
“당신은 정원에 어떤 식물이 있는지 잘 아는군요.”
“그럼요. 이 정원은 내가 하나씩 심고 가꾼 것들로 가득한걸요.”
리아는 방치된 채 죽어가던 정원의 식물들을 떠올렸다.
“내가 살았던 성의 정원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온갖 빛깔이 어우러져 있었죠. 마지막엔 그 누구도 돌보지 않아 망가져 버렸지만. 만약 당신이었다면 그렇게 두지 않았을 거예요.”
“나였다면 애초에 그 성의 주인이 되지도 못했겠지요.”
“궁금해요. 당신은 후회한 적 있나요? 내가 당신이라면 삶의 어느 순간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만일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출발점에 머문 사람일 거예요. 나는 많은 일을 겪었고 매 순간 후회했답니다.”
“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순간은 모두에게 두려움이지요.”
“부러워요, 당신이. 그 모든 순간을 지났잖아요.”
“부인, 난 로즈로 태어났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당신 말대로 후회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도 후회해요.”
“어째서요? 잘못된 선택 때문인가요?”
“아뇨. 난 꽤나 선택을 잘 해왔다고 자부해요. 내가 후회하는 건 더 욕심내지 않은 것들이에요. 지레짐작으로 포기해 버린 것들을 후회해요.”
“그런데도 당신은 모든 걸 가졌는걸요.”
“아뇨. 난 그저 최대의 노력으로 살아남았을 뿐이에요.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날 이곳에 묶어요. 웃기는 일이에요.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것들을 가지고 나니 이제 혼자 있고 싶어 졌어요.”
“간절히 원하는 걸 가졌는데 떠나고 싶다니. 막상 모든 것이 떠나고 나면 아주 힘들 거예요.”
“그래서 아직 이곳에 있는 거예요. 나도 아직 두렵거든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걸요.”
“언제나처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을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것에 익숙해요. 완벽했던 당신은 아마 힘들 거예요. 당신은 모든 것에 간절하지 않았으니까요.”
“그게 두려워요. 난 평생 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간절하겠지요.”
“공작부인 시절을 원한다면 그럴 수밖에요.”
“뭐든 쉽게 말하는군요. 난 혼자 살아내기 위해 과거의 당신처럼 노력하고 있어요. 공작부인이 되길 원했다면 그 성에 머물렀겠지요.”
“글쎄요, 부인. 하녀였던 여자의 집에 머문다고 하셨지요? 나였다면 그 집에 있지 않을 거예요.”
“이네트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물론 그렇겠지요. 그러니 모든 걸 잃은 주인을 지금도 모시고 있는 거지요.”
“나도 그 집에서 나름대로 할 일을 해요. 이네트의 두 딸을 가르치지요.”
“이네트에게 필요한 건 다락에 사는 가정교사가 아니라 돈일 텐데요.”
“이네트가 원한다면 나는 드레스를 팔아서라도 돈을 줬을 거예요.”
“애초에 당신에게 부탁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군요.”
“어째서요? 나는 누구보다 그녀를 믿고 아끼는걸요.”
“그 하녀 역시도 마찬가지로 당신을 아껴요. 그러니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고 받아준 거지요.”
“하지만 나는...”
“부인, 당신은 아직 공작부인이었던 시절을 놓아버릴 준비가 되지 않은 거예요.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줄 유일한 사람을 놓기가 쉽지 않겠지요.”
“아니에요! 난 이네트를 친우로서 아껴요!”
“영애 시절부터 시중을 들어온 하녀가 어떻게 친우일 수 있나요? 당신은 모든 것을 잃기 전 그녀의 삶에 대해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었을 텐데요.”
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플레아의 말이 사실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둘 사이 침묵이 길어졌다. 플레아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제 다시는 공작부인이 될 수 없어요. 어쩌면 방탕한 귀족의 첩이 될 수는 있겠지요. 당신은 아름다우니까요. 당신이 말했듯 정말 혼자 살아내고 싶다면 그녀의 집에서 나와야만 해요.”
“지금 당장은 돈이 없는걸요.”
“이곳에서 진짜 일을 해요. 꽃을 따고 품삯을 받아요. 그리고 그림을 그려 자금을 마련해요.”
“이네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내겐 진짜 일이에요. 나는 그 아이들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하녀의 좁은 집에서 폐를 끼치는 게 어떻게 독립일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아마 며칠 후에 당신은 이곳을 찾아오겠지요. 오늘 저잣거리에서 나를 찾았듯.”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나도 내게 최선이 뭔지 알 만큼은 생각할 줄 알아요.”
“부인, 당신을 높이 평가하니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은 두려움에 머물 사람이 아니니까요. 공작부인의 최선은 잊어요. 부디 기회를 놓치지 말아요.”
“이만 가볼게요.”
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플레아의 집을 나왔다. 달빛이 플레아의 정원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이런 정원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플레아의 말이 옳았다.
리아는 다시 가질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