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이야기
배우지 못해 순수한 사람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가.
스테판은 작고한 타티아나 공작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타티아나 공작부인은 로즈 보육원의 창립자이자 드물게 보통 사람들의 삶에 호기심을 갖는 귀족이었다.
“플레아, 보육원 관리를 아주 잘해 주고 있구나.”
“별말씀을요. 원장님께는 미치지 못하는걸요.”
“타티아나 공작부인이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보육원의 정원이 이리도 아름답고 아이들도 잘 자라니 말이야.”
스테판의 말에 플레아가 미소 지었다. 냉철하기로 소문난 그녀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칭찬이었다.
플레아가 보육원 운영을 맡은 이후 스테판은 종종 조언을 해 주거나 둘러보러 오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서신도 없이 찾아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스테판은 타티아나 공작부인의 하녀로 아홉 살 때부터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공작부인은 훗날 스테판에게 로즈 보육원의 총관리직을 맡겼고 스테판은 그 일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다른 삶은 생각할 수 없었다. 로즈 보육원의 아이들을 독립할 수 있게 하려고 저잣거리 상인들과 거래를 했고 그녀 자신도 그 과정에서 수없이 단련되었다.
삶은 한없이 부드럽고 쉽게 휩쓸리던 그녀를 곧고 단단한 창살로 만들었다.
몇몇 사내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의 아내로 살아가려면 보육원을 포기해야 했다. 유독 한 사내만큼은 떨쳐내기 힘들었으나 뒤에서 울지언정 한 번도 로즈 들을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강하고 냉철하고 단단한 여자. 스테판은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었고 그것에 만족했다.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오 년 전, 플레아에게 로즈 보육원의 책임자 자리를 넘겨주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녀를 강하게 단련시켰던 삶은 이제와 그녀에게 삶에 스며들라 하였다.
“나이가 드시니 원장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혼자 있어서겠지.”
“외롭다는 말을 돌려하시는 건가요?”
“아니. 혼자가 되면 이렇게 생각이 많아진다는 걸 말하는 거란다.”
스테판이 플레아가 건네는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얗게 센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망토를 두른 탓인지 그녀는 귀족들에게 고용된 마법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곤란한데요. 전 지금도 이렇게 생각이 많은데 말이에요.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군요.”
“젊은 시절의 나에 비하면 넌 정말 잘 해내고 있어, 플레아.”
“원장님은 예전부터 단단해 보였는걸요. 난 그렇게 강단 있지는 못해요. 속으로 늘 고민하죠.”
“언제나 상대적인 거야, 플레아. 어릴 땐 나보다 강한 누군가를 보며 끊임없이 나의 부족함을 탓했지. 넌 그런 부분이 나와 아주 비슷해.”
“그것도 칭찬인가요?”
“염려지. 그렇게 살면 가까이 있는 즐거움을 놓치게 될 거야.”
“제게 로즈 보육원을 물려주시더니 보통 노인이 되셨나 보군요. 이제 햇살의 아름다움, 노을을 보며 느끼는 벅찬 감격에 대해 말씀하실 건가요?”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했었어. 그런 걸 즐기기엔 내 삶은 너무 부족하다고 말이야. 그게 잘못된 건 아니야, 플레아.”
“후회하시나요? 젊은 시절 평범한 것을 즐기지 못한 것을요.”
“후회했지. 아주 많이.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빠듯하게 살았을 거야.”
“아직 와닿지 않아요.”
“플레아, 넌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야. 겪어야만 깨닫지. 하지만 겪어 내기엔 두려움이 많아.”
“전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는걸요. 더 이상 두려울 것도 놀랄 것도 없어요.”
“너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 플레아.”
“이미 그러고 있어요.”
“아니, 플레아. 그들의 삶을 이해해 보려 해야 해. 이해하는 사람들을 미워할 순 없거든.”
“전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요.”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넌 너 자신을 미워하잖니.”
“난 지금의 내가 좋은걸요. 더 이상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도 않고 내가 이룬 성과도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채찍질만을 하겠어, 플레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이룬 것들은 한때야.”
“하지만 내게 그런 삶을 알려준 건 원장님이었는걸요. 그리고 그걸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플레아, 널 아껴서 네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그게 오히려 네게 짐이 된 건 아닐까 염려되는구나.”
“염려하지 말아요. 보시다시피 로즈 보육원은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있고 난 그게 좋아요. 이제야말로 내 삶이 예상 가능해졌어요.”
“넌 꿈꾸는 모든 것을 이루는 아이였지. 그러니 이제 다른 꿈도 꿔 봐.”
“이제 와서요?”
“늦지 않았어.”
“오늘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인가요? 칭찬하는 척 부드럽게 삶을 가르치기 위해?”
스테판이 다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니.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야.”
“마지막 인사라니... 무슨...”
“로즈 보육원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이제 곁에 두지 않기로 했단다.”
“하지만 그럼 타티아나 공작부인의 묘는 누가 돌보나요?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땐 이제 누구에게 말 하나요? 원장님, 그렇게 떠날 수는 없어요!”
“배우지 못해 순수한 사람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가. 타티아나 부인은 이 말을 떠올리고는 보육원을 만들어 진심을 시험했지. 겸허하게 갈고닦았어. 하지만 플레아, 알고 보니 내게 그 말은 다른 이를 위한 말이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이죠?”
“나도 내 삶을 배우지 못했어. 이제 나에게만 진심이고 싶구나, 플레아.”
“이건 진심이 아니라 충동이에요, 스테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오, 플레아. 타티아나 부인의 충동이 로즈 보육원을 만들었고 그게 우리 삶이 되어버렸어. 충동은 어쩌면 너무나 빠르게 지나버리는 유성 같은 것일지도 몰라. 보는 사람은 많지만 쫓아가는 사람은 몇 없지.”
“당신답지 않아요, 스테판.”
“플레아, 넌 젊은 시절의 나보다 훌륭해. 더 강하고 단단해. 그러니 금방 알게 될 거야. 다른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진심은 커질 수 없어.”
스테판이 천천히 망토의 끈을 조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에는 옷가지가 든 낡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네 삶은 틀리지 않았어, 플레아. 그러니 내 도움도 필요 없단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아 미안하구나.”
스테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플레아는 슬프지 않았다. 처음 보는 스테판의 모습이 낯설어 차라리 그녀가 얼른 떠나 주기를 바랐다.
“언제든 돌아와요, 스테판.”
스테판은 대답 없이 떠났다.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뒤늦게 스테판을 태운 마차의 마부를 찾아 수소문해 보니 끝없는 여름이 이어지는 나라로 향하는 배를 탔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