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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Sep 01. 2021

어른을 위한 동화(12)

마리아나 이야기

마리아나는 근래 친해진 레이나와 저잣거리에 왔다.

레이나는 마리아나와 비슷한 처지의 공작부인이었다. 돈은 있으나 명예는 없는 후작의 딸로 태어나 자연스레 재력이 필요한 공작 가문의 장남과 혼인을 했다. 그리고 그 위치에 매우 만족했다.


레이나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부류의 사람이었고 그래서 마리아나는 그녀와 있을 때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귀족 부인들을 대할 때와 달리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 저것 좀 봐요!”

   

호들갑스러운 레이나의 목소리에도 마리아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레이나는 늘 호들갑스러웠기 때문에.    


“저 사람이요! 혹시... 요나스 공작부인 아닌가요?”   

 

마리아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레이나의 기다란 손가락 끝에 리아가 보였다. 정말 리아였다.    

 

“맞죠? 그 쫓겨난 공작부인이 맞죠?”   

 

“맞군요.”

   

“세상에, 성의 모든 물건을 도둑맞고 도망쳤다고 하더니 저잣거리에서 사나 봐요. 가엾어라.”    


마리아나는 레이나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이제 레이나는 리아가 저잣거리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여기저기 다 퍼뜨리고 다닐 것이 분명했다.  

  

“가엾을 이유는 없지요. 애초에 죄를 지었는걸요.”  

  

“그렇지만... 그런 생각 안 해 보셨어요? 쫓겨난 공작부인의 일이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거요.”

   

“안 해요. 내 남편은 국왕 폐하의 신실한 하인이고 절대 다른 마음을 품을 사람이 아니니까요.”    


“내 남편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내 말은 우리도 어떤 일로든 공작부인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요. 그런 생각 해 보지 않았어요?”  

  

“잘못하지 않으면 쫓겨날 리도 없지요.”

   

“전 아직 공작부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 생각을 하나 봐요. 늘 두렵거든요.”

   

솔직함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천박함. 마리아나는 레이나가 내뱉는 두려움이라는 단어에 마음속으로 코웃음 쳤다. 이리도 단순한 두려움이라면 평생 겪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레이나, 걱정 말아요. 익숙해지면 모든 것은 무뎌진답니다.”   

 

“저것 좀 봐요, 마리아나. 세상에. 지금 그림을 팔고 있는 거죠?”

   

마리아나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도 잊은 채 레이나의 시선은 다시 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니.”  

  

“세상에! 그 많은 재산을 도둑맞았다는 것이 진짜인가 봐요! 저잣거리에서 저런 추레한 옷을 입고 장사를 하다니! 오, 가엾어라. 남편을 잃고 작위도 잃은 삶은 저런 것이로군요!”  

  

묘하게 들뜬 레이나의 목소리에 마리아나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목소리가 너무 커요, 레이나. 모두가 듣겠어요.”  

  

“어머나, 죄송해요. 너무 놀라는 바람에...”  

  

“이제 그만 가요.”  

  

“하지만 궁금하지 않나요? 전 가까이 가서 어떤 그림을 팔고 있는지 궁금한데요.”    


“괜히 같이 있는 걸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어요.”  

  

“한때 마리아나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들었어요.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해도 레이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일이지요. 우리는 이제 가는 길이 달라요. 알던 것도 모르게 된 거지요.”    


“알던 것도 모르다니요?”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진짜 친우였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만일 한쪽이라도 감춘 마음이 있다면 그 관계는 언제든 어그러질 수 있는 거랍니다.”   

 

“누구였나요, 감춘 것이?”  

  

“우린 서로 감춘 것이 많았지요.”    


“거짓말이군요.”    


레이나가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무슨 말이죠?”   

 

“아마 당신이었을 거예요, 감춘 것은.”   

 

“어째서요?”    


“당신은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니까요. 그런 사람에겐 비밀이 많더군요.”   

 

“당신은 우리 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할 텐데요. 함부로 말하는군요.”    


“마리아나, 난 당신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인 걸 알아요. 말이 많고 무식하다고 생각하겠죠. 우리가 나는 대화는 늘 같은 곳을 맴돌아요. 당신이 나와 보내는 시간을 진심으로 좋아했다면 그럴 순 없었겠죠.”    


“그렇게 생각한다니 유감이군요. 난 당신에게도 예의를 다했는걸요.”    


“오, 조금이라도 미안해하거나 언짢을 필요 없어요. 내게도 딱 당신 정도의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니까요.”

   

“무슨 말이죠?”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 텐데요.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요.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알지요. 그 귀족 부인들이 나보다 고상하기를 원한다면 그냥 나를 낮추면 돼요. 그게 뭐 어렵나요. 내가 원하는 건 공작부인이 되는 거였고 드디어 그 꿈을 이루었는데요.”    


“난 당신과는 달라요. 나 자신을 낮출 생각은 없어요.”    


“알아요. 그래서 당신은 비밀이 많은 거예요. 사실은 우리 누구보다 자신이 교양 있다고 생각하죠. 아는 게 많아서 괴롭다고 생각할 테고, 어쩌면 남편보다도 때로 자신이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겠죠.”    


“무례하군요.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당신은 지금 나와 내 남편 모두를 욕보이고 있어요.”    


“걱정 말아요. 오늘이 마지막일 거예요, 이런 말을 하는 건. 난 내 역할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거든요.”  

  

“마지막일 것 같은 말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낫지 않겠어요?”   

 

“마지막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면 더 강하게 말해야겠죠. 상대는 더 이상 반론할 기회조차 없을 테니 얼마나 막막하겠어요.”    


“알고 보니 무서운 사람이군요. 상냥한 웃음 뒤에 송곳 같은 말을 감추고 있었다니.”  

  

“오, 마리아나. 그러지 말아요. 당신에게 상처를 주려던 건 아니었어요. 난 그저 문득, 당신의 진심이 궁금했을 뿐이랍니다.”   

 

“비밀만이 진심인 건 아니지요. 내가 당신에게 베푼 친절도 진심이에요. 그러니 새로운 걸 알아내려는 행동은 하지 말아요.”    


“모두에게 공평한 마음은 진심일 수 없어요.”   

 

“공평하고 공정한 태도가 무엇보다 귀해요.”    


“무슨 말이에요. 그건 거짓이에요. 가정교사들이 떠벌리는, 온종일 책이나 읽는 작자들이 내뱉는 헛소리라고요. 진심은 찰나의 편견과 차별에서 드러나요. 각별한 누군가를 대할 때 공평할 수 있나요? 뜨거운 마음을 감출 수 있다고요? 그거야말로 무서운 거예요.”  

  

마리아나는 저잣거리에서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친절하게 레이나에게 말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랍니다, 레이나. 이제 공작부인이 되었으니 예의에 대한 의심은 깊이 묻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오, 걱정 말아요. 당신보다도 그 예의에 대해선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레이나가 마리아나의 팔짱을 꼈다. 리아가 자신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리아는 마리아나를 보았지만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마리아나 역시 모른 척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리아의 옆에서 꽃을 팔던 플레아가 빤히 리아를 보다 입을 열었다.    


“리아,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손님과 눈을 마주쳐야죠.”    


“귀족 부인 두 분이 날 바라보았어요.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아 쳐다볼 수가 없군요.”

   

“왜요? 당당히 고개를 들어야죠, 리아.”

   

“마주쳐도 할 말이 없는걸요.”    


“소중한 사람이었나 봐요.”    


“한때는요.”    


“그 사람도 똑같이 그리울 거예요.”

   

“아뇨. 그렇지 않으니 우린 만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소중한 관계라면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어요.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그 사람도 당신이 소중했을 거예요.”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쉽게 잊고 떠날 수 있나요? 소중하다면 옆을 지켜야죠.”  

  

“오, 리아. 그 사람 인생에 당신이 전부일 수는 없지요. 그건 욕심이에요.”    


“전부이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힘들 때 옆에 있어 주길 바란 거예요.”

   

“만일 당신이 아팠다면, 단순히 마음이 아픈 거였다면 분명 옆에 있어 주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삶을 뒤흔드는 큰 사건 앞에 어떻게 그 옆을 지키겠어요. 함께 휘말릴 텐데.”    


“나였다면 함께 했을 거예요.”    


“리아, 그 사람에게도 리아가 소중했어요. 소중하지 않은 것과 추억을 만들 리 없죠. 다만 더 간절히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었을 뿐이에요. 첫 번째가 아니라고 투정 부릴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지 않아요?”   

 

“날 가르치려 하는군요.”    


“아뇨, 당신의 화를 풀어주는 거예요.”

   

“화나지 않았는데요.”   

 

“쌓아두는 거예요, 당신은. 화내는 법을 모르니까.”    


“플레아, 당신과 이야기할 때마다 내가 너무 미숙하고 철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당신 생각일 뿐이에요. 내게 덮어 씌우지 말아요.”    


리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사람들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억지로 웃는 것은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억지로 웃는 사람을 얼마나 경멸했는지를 떠올리자 리아는 마음이 쓰려왔다.  

  

“당신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말아요.”   

 

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플레아 역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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