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나 이야기
레이나는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드레스를 입었다.
저잣거리에서 꽃을 파는 리아의 모습을 본 이후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은 더 높아졌다.
대우받는 삶이 당연한 위치에서 누리고 싶은 것들을 모두 누리는 삶. 소녀 시절의 꿈을 그저 환상이라 하는 이도 있었지만 레이나는 그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 낸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율리아가 떠오르는 순간들만 빼면.
율리아는 레이나의 쌍둥이 자매였다. 서로 묻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만큼 잘 통했던 자매에게는 둘만의 완벽한 세상이 있었다. 율리아는 천진난만했고 사람들을 좋아했다. 아버지만큼이나 속세의 법칙에 능했던 레이나는 그런 율리아가 불안했다. 언젠가 저 속이 시꺼먼 사람들이 율리아를 없애버릴 것만 같았다.
“레이나, 나는 사람들이 궁금해. 모두 같은 사람인데 말이야 어찌 이리도 사는 모습은 제각각일까.”
“위험해, 율리아. 넌 사람들을 너무 잘 믿어. 그들이 언젠간 너를 없애버릴 거야.”
“레이나, 없애버리다니. 내게 그렇게 웃어 주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없애겠어.”
“말했잖아, 율리아. 난 사람들의 마음의 빛이 보여. 색깔로 말이야. 우리 주변에 아버지를 보러 오는 손님들은 모두 속이 시커멓다고.”
“그건 네 생각이 만들어 낸 색이야.”
“아니. 일전에 아버지의 재산을 빼돌리려 했던 아드리안 남작을 생각해 봐. 넌 그가 딱한 사람이라 했지. 그렇지만 그는 그저 제게 오는 모든 연민을 보상처럼 생각하는 일개 사기꾼일 뿐이었어. 난 알았어 율리아. 나만 알았다고! 그자의 속은 회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하수구 빛이라는 걸 나만 알았어.”
“레이나, 그 사람 때문에 모두를 미워할 필요는 없어. 그러지 마. 우리를 어여삐 여기고 무도회에 초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봐. 우리를 사랑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어.”
“무슨 말이야, 도대체. 어째서 피할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것들을 엉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억지로 좋게 보라고 하지 마. 내겐 그게 더 힘드니까.”
“레이나, 하지만 난 네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길 바라. 우리 둘만 언제까지 함께 할 수는 없어.”
“알아. 하지만 난 네가 걱정되는 거야. 난 위험을 피하겠지만 넌 그럴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위험이라면 레이나, 충분히 빠져들 가치가 있어.”
레이나는 율리아를 지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람들은 율리아처럼 순수함을 빛내는 드물고 희귀한 것들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수많은 구혼자들이 오갔고 그들의 마음은 모두 검은빛이었다. 후작은 공작 가문의 장남과 율리아가 이어지길 바랐으나 율리아는 이미 한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후였다.
그 남자는 레이나와 율리아를 곁에서 보호하던 기사였다. 그의 마음 역시 검었고 그와 어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율리아의 마음도 점점 회색빛이 되었다.
“당장 그만둬! 아버지에게 말해서 그자를 죽여버릴 거야!”
“제발, 레이나. 그러지 마. 너도 언젠가 사랑하게 된다면 내 마음을 알 거야.”
“아니, 율리아. 그럴 리가 없어. 난 너처럼 속내가 훤히 보이는 남자에게 날 맡기진 않을 거야.”
“내가 믿는 건 내 마음이야, 레이나. 그러니 날 걱정하지는 마.”
“넌 아무것도 몰라, 율리아! 어째서 그렇게까지 널 망쳐버리는 거야?”
“어쩌면 레이나, 네가 보는 마음의 빛이라는 건 모든 어른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어둡고 축축하고 하수구 같다고 한 그 색 말이야. 나도 때가 되어 그 색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야.”
“그깟 검술이나 하는 남자 때문에 네 마음이 썩어 가는 걸 모른 척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분명해. 레이나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율리아는 다음 날 서신 한 장을 남겨두고는 그 남자와 도망쳤다. 후작은 사랑하는 딸에 대한 배신감에 마음이 더 검은빛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한 수를 내어야 했다.
둘째 딸은 신의 부름을 받아 혼인을 할 수 없다 공표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율리아를 잡아 수도원에 가두기 위해 가문의 기사들을 보냈다.
레이나 역시 상심에 빠졌다. 율리아는 절대 행복할 수 없으니. 스스로 삶을 망가뜨린 율리아에 대한 배신감보다도,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 기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도 때가 되어 그 색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야.’
율리아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병들어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였다. 레이나와 율리아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더 짙어질 수도 없게 검게 변한 순간, 레이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제야 어느 정도 나이 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검은 것을 이해했다. 언제까지고 순수할 수 없으니 사람은 모두 마음이 검어져야만 했다.
“율리아는 어디선가 잘살고 있겠지? 언젠간 돌아올 거야. 그렇게 사라져 버릴 만큼 모진 애가 아니잖니.”
딸에 대한 희망은 그녀의 마음을 더 검게 물들였다. 희망은 일순간 씁쓸한 미소로 변했고 레이나는 그 미소를 보며 이제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확신만을 얻었다. 율리아가 없으니 혼자서라도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야 했다.
“마님, 여기 진주 장식을 달까요?”
“아니, 충분해. 갓 공작부인이 된 주제에 다른 부인들보다 화려해선 안 되지.”
“그렇지만 아무 장식도 없이 가면 무시당하실 거예요.”
“지금은 무시가 질타보다 나은 선택이란다.”
레이나는 율리아가 떠난 이후 그녀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겨우 검술이나 하는 남자를 따라가 도대체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혹시 이미 죽어버린 건 아닐까. 희망은 슬픔이 되고 그리움이 되었다가 체념이 되었다.
저잣거리에서 그림을 파는 리아를 보았을 때, 율리아는 리아의 마음의 색을 보았다.
율리아처럼 투명했던 리아의 마음이 검어진 것을 보고 레이나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소중한 것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느 것도 지나치게 소중해지지 않게 거리를 둬야 했다.
소중한 것을 잃어 마음이 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또 다른 소중한 것들에 의지하려 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레이나는 다시 저잣거리로 가 리아를 만나리라 마음먹었다. 아름다웠던 공작부인의 몰락을 좀 더 깊게 음미하고 싶었다.